며칠 전, 아름이가 링크 하나를 보내주었다. ‘무료 성격 유형 검사, 성격 유형 설명…’으로 이어지는 제목만으로도 킬링 타임용 심리 테스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때마침 바쁜 일도 없이 소파에 누워 있던 참이라 링크를 클릭하고 테스트를 이어갔다. 예상보다 섬세한 질문들 앞에서 몇 번 머뭇거리며 진행하다보니 완료하는 데까지 7분이나 걸렸다. 킬링 타임치곤 꽤 신중했던 터라 내심 결과가 궁금했다.

몇 초의 기다림 후 읽게 된 결과 내용은 놀라웠다. 얼핏 끼워 맞추기 같긴 했는데, 그 문장들을 내 상황에 대입하면 테트리스 조각처럼 딱 들어맞았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우여곡절을 늘어놓는 점쟁이에게 절대 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인데. 아마 내가 점 보러 다니는 일에 심취했다면 복비로 가산을 탕진했을 것이리라.

여러 이야기 중, 가장 공감했던 건 ‘누가 내 일하는 방식에 대해 간섭하면 개빡침. 남의 가치관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쓰고 인정하는 편. 누가 내 가치관에 뭐라 하는 거 싫어함.’이었다. (워딩이 거칠지만 원문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더욱 강해진 내 성향을 적확히 표현하는 문장이었다. 서른을 넘기고,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출산 계획 없는 결혼을 준비하는 요즘의 나에게는 ‘이해’ 보다는 ‘인정’이 더 간절한 가치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것. 이해할 수 없다고 간섭하거나 충고하며 주제넘지 않는 것. 스스로도 그런 태도를 견지하려 하고 남들도 그래줬음 좋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산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걱정’을 가장한 ‘충고’를 해대는 사람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말년에 부부 둘이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 분명히 후회한다.”며 나도 모르는 수십 년 뒤를 예언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딩크족으로 살겠다고 못을 박은 것도 아니고, ‘지금 계획이 없을 뿐,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라고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 다음 레퍼토리는 “노산이 얼마나 위험한데” 이니까. 무엇보다도 직접 몸으로 출산의 모든 과정을 감내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애초에 남편이 될 내가 낳겠다 말겠다 할 것도 아니고, 결정권의 비중은 절대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삶의 경력을 인정하는 차원에서라도 ‘그래,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씀이긴 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허구한 날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연애 고민을 털어놓거나 연애 경험도 그리 많지 않은 또래가 그런 얘길 하면 황당하다. 우리 커플은 11년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둘만 있는 시간이 행복한데. 결혼 준비 과정에서 조금의 다툼도 없었고, 양가 허락을 받고서 식 전에 함께 살고 있는 지금도 너무나 편안하게 잘만 지내는데.

보통은 그럴 때조차도 나는 웬만하면 대꾸하거나 토론하지 않는다. 그냥 ‘걱정해주는 마음 고맙고,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느낌을 담은 온화한 미소로 넘기면 그만이다. 이미 그런 식으로 서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사람들은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교조적인 태도로 ‘강요’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어가봐야, 그래서 최종적으로 둘 중 누구의 의견이 합당한지 결론이 나봐야, 서로의 가치관은 여전할 것이고 감정만 소모된다.

그러니까, 세상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로가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다름’은 반드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하고 싶은 만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땐 그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면 그만이다. 본인에게 피해가 오거나, 혹은 본인이 책임져줄 것이 아니라면 타인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오지랖 부리지 않는 편이 좋다. 그냥 ‘이해는 안 되지만, 뭐 너는 그렇게 산다니까.’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각자의 ‘선’을 지켜주는 일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나 부부의 경우에는 그 선을 지키고, 이해가 아닌 인정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너무나 가까운 사이이고, 너의 가치관의 나의 가치관을 직접 침해하는 경우가 빈번할 테니까. 그러나 가족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데 친하다는 이유로 선을 넘는 건 순전히 오지랖이다.

삶의 방식이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타인을 오해하고, 오지랖 부린다. 나는 주 4,5일을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겉으로 보기엔 무거운 중량을 기를 쓰고 들어보려고 하는 게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각자의 목적에 따라 다른 운동법을 추구한다. 파워리프팅이 목적인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무거운 중량을 들어보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각처럼 빚어 높은 몸매라든가 잘록한 허리, 근비대 효과를 높이기 위한 8-12회의 반복 횟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 1회라도, 얼마나 더 무거운 중량을 들 수 있는가만이 중요하다. 근육질의 몸매를 만들고 싶은 사람 중에서도 크고 볼륨감 있는 근육을 원하는지, 체지방이 제거된 슬림한 근육을 원하는지에 따라 운동 방법이 다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근육보다는 삐쩍 말랐다 싶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유산소 운동에만 전념한다.

각자 추구하는 삶의 방식,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에 따라 서로 다른 운동을 하는 것뿐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나는 나의 방식과 중량으로 운동하면 그만이다. 파워리프팅을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근비대에 비효율적이고 관절이랑 인대에도 안 좋아요. 중량 낮추세요.”라고 말하거나, 유산소에 전념하는 사람에게 “남자라면 근육이 좀 있어야죠. 유산소 그만 하고 얼른 덤벨, 바벨 들어봐요.”라고 해선 안 된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살아야만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오만함을 멈춰야 한다는 거다.

근육 얘길 하니까 생각나는 글이 있다. 배우 봉태규 분의 에세이 『개별적 자아』에 실린 <노 모어 근육맨, 나만 그런가요?> 대중목욕탕의 온탕에 앉아 나체로 활보하는 다양한 몸매의 남자들을 보며, 작가는 ‘오로지 근육만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복지기관에서 정기적으로 프로틴과 닭 가슴살을 제공하고, 체지방률 기준을 초과하면 차량 구입이 제한되는 사회. 저체중인 사람은 의무적으로 고열량 식사를 하고 소비열량을 줄이기 위해 재택근무만 가능한 사회. 근육질의 몸매를 갈망하는 나에게는 좋은 사회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권리 침해가 빈번한 사회일 것이다. 실현불가능해서 황당하지만, 실현된다면 황당함을 넘어 두렵기까지 한 사회.

‘확실히 모두들 근육질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로.’ 몸매의 비유로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의 글은 끝난다. 그래 맞다. 건강에 문제만 없다면야 몸매야 어떻든 자신이 만족하면 그만이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한들, 본인이 책임지고 감당할 일이지 내가 비난하고 비판할 것은 아니다. (치료비와 PT 비용 일체를 지원한다면 마땅히 쓴 소리할 자격이 있겠지만, 오지랖 부리는 사람치고 그런 사람 못 봤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 서로를 걱정하는 말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더더욱 입단속이 시급하다.

굳이 세상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근데,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충고하고 가르치려는 짓만은 하지 말자. 이해할 필요 없고, 인정만이라도 하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