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세계속으로 라는 티비 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거의 초딩때부터도 티비에서 계속해서 해주던 프로그램이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정말 장수 프로그램중의 장수 풍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외할머니가 이 프로그램을 아주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지금은 드라마를 더 좋아하시지만, 내가 어릴때만 해도 할머니 집에 가면 항상 이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할머니가 자주 하던 얘기는 ‘저기도 가 봤고, 저기도 가 봤고, 저기도 가 봤고…’ 어디든 다 가봤는데 어디는 좋더라, 어디는 별로더라, 이런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생각해보니 세계 여러 나라는 정말 많이 돌아다닌 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이국적인 풍경이 티비라는 2차원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여지면 뭔가 지루하고 가짜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당장 내 눈 뿐만이 아닌 내 몸으로도, 3차원의 공간에 시간과 공기 분위기까지 더한 4차원의 환경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린아이의 나에게는 동네 놀이터보다도 흥미롭지 못한게 해외여행 티비 프로그램이었다. 지루하게 펼쳐지는 풍경들이, 내게는 그닥 이국적이지도 압도적이지도, 리얼하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으니 사정이 조금 달라져서, 이제는 티비 프로를 돌리다가 배경이 외국이기만 하면 여행 프로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이기만 해도 채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첫 여행을 다녀온게 벌써 6년 전, 20대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리라 생각하고 갔던 여행은, 정말로 20대의 마지막 해외 여행이 되었고, 30대의 첫 해외 여행은 아직 가보지도 못하고 6년이 흘렀다. 언젠가 다시 와서 또 신나게 놀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자극을 받고 쉬러 오리라 다짐했는데, 그렇게 별로 하는 것도 없이 삶에 치여서 6년이 흘렀다. 문득 어? 벌써 6년이나 흘렀다고? 이런 생각이 들면 오싹해지면서,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나오는 해외의 풍경에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던 탓에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숙소를 운영하며 여행자들에게 밥을 해주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아… 그저 그립고 또 그립기만 하다. 그들이 걸었던 저 길을 나도 걸었고, 그들이 잠들었던 저 2층 침대가 있는 숙소에 나도 잠들었었는데. 스페인 구 시가지 특유의 잘 정비된 돌이 깔린 길들, 비가 오면 반짝반짝 빛나며 또 젖어들어서 내 마음도 같이 젖게 했던 풍경들, 벽돌과 지붕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색으로 뽐을 내며 어우러지던 것들, 친절했던 사람들과, 맥주한잔에 와인한병, 길에서 여유롭게 잠을 청하던 길고양이들, 북부 스페인의 습기 없는 건조하고 청량한 하늘과 공기, 아무리 뜨거운 땡볕이어도 그늘에만 가면 추워서 오한이 들 정도로 시원했던 그 날씨, 이런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나는 그 예능 프로에서 주인공 연예인들이 나와 밥을 하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기억도 남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주변에서 카메라에 같이 잡히는 그 풍경과 공기, 분위기를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 참 좋았지, 지금도 좋겠지? 가고 싶다. 언젠가 또 가야지.

예전에는 정말 싫어해서 들춰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보게 되는 것이 또 있다. 여행 관련 에세이나 정보 책이다. 친구가 선물해준 일본 온천 여행 가이드 북이 있었는데, 그때는 3.11 동일본 대지진 참사가 벌어지기 전이어서 꽤 열심히 읽으면서 탐독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를 가고 저기를 가고 어떻게 가고 돈은 얼마를 모으고… 꽤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은 사실 일본 불매 운동 때문이 아니라 대지진의 여파에 대한 위험심리가 더 커지면서 접게 되었다.

처음으로 읽은 여행 정보 책은 군대에서였다. 말년 병장이었던 선임이 전역하면 여행 갈 거라면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 <런던 나비> 라는 책을 사 왔다. 뭐 여행 에세이도 뭣도 아니고 그저 런던 여행에 관련된 정보를 담은 책이었다. 당연히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크게 나갈 계획 없던 나였건만, 군대라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곧 전역을 앞둔 사람으로서, 뭔가 이 좁디 좁은 군대를 벗어나, 군대로 끌려오게 한 이 좁디 좁은 대한민국도 벗어나서, 정말 큰 세계로 자유롭게 훨훨 나비처럼 날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런던 나비>는 정말 페이지가 닳을 정도로 돌려 본 책이었다.

나뿐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는지, 후임들도, 선임들도, 동기들도 그 책을 정말 너무 좋아했었다. 그때 그 책을 다같이 돌려 읽었던 사람들중에 정말로 런던을 가본 사람이 있는지가 참 궁금하다. 일단 나는 아니지만. 그때 그 책을 읽으며, 밑줄을 치면서, 그리고 사진들을 보면서 상상을 하면서, 나는 이미 상상속에서는 런던의 한복판에 있었다. 더럽고 냄새나고 꾀죄죄한 개구리 군복을 벗고, 짧게 자른 머리도 길게 기르고, 부츠에 청바지, 코트를 입고서 템즈강을 배경으로 셀카 한방 박은 다음에, 강을 바라보며 맥주한잔 하며 이국의 낯선 길을 걸어다니는 나는, 이미 런더너였다.

어쩌면 해외여행을 가고싶다는 욕망이 그때부터 생겼던 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정말 많이 간다고 비판적인 시각과 의견도 있지만, 그게 뭐 어때서인지 모르겠다. 그만큼 한국이란 나라가 지긋지긋한 걸 수도 있겠다. 한국은 어딜 가도 한국이어서, 최소한 일본이든 대만이든 샹하이든 해외를 나가야 한국이 아닌 곳에서의 리프레시가 되는 게 아닐까. 나로서는 군대를 전역하면서 여행이랍시고 국내 여행을 간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 대한민국은 나를 군대로 끌고가게 한 나라였고, 그런 곳에서 심지어 군인 시절에 무슨 리프레시 따위는 상상하거나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그렇게 금방 떠나고 싶고 떠날 수 있었던 해외를 전역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4년에서 5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곧바로 다시 대학교를 가느라 그랬던 것도 있을 것이고, 전공 상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쉽게 구하기 힘들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휴학한 뒤에 곧바로 돈을 벌지 못했던 것도 있을 것이겠지만, 어찌됐든 나는 그동안은 딱히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었다. 항상 언젠가는 이란 생각만 하며 여행을 꿈꾸고만 있었다.

계획과 꿈은 다르다. 나는 여행을 꿈꿨지만 계획하진 않았었다.

그러다 휴학을 하고 마침내 반드시 여행을 가겠다고 계획을 하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월급으로 왕복 비행기표를 바로 긁어버리면서 일이 아무리 더러워도 여행 자금을 모아야 했기에 계속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비행기 출발 날짜가 다가오게 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여행 계획을 세운 뒤에 비행기 날짜가 다 돼서 나는 날아갔다.

여행을 계획하게 되는 것은 꿈꾸는 것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였다. 일단 비행기표를 사면 어떻게든 여행을 가게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 그런지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 뒤에도 일단 비행기표를 산 적이 없었고, 그럴만한 재력을 갖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행을 계획할 일이 없었다.

동시에 그런 마음을 여행 프로그램이나 티비 예능, 그리고 여행 책자나 에세이 같은 걸 보면서 보강하는 것이었다. 여행을 꿈꾸는 마음만 더 커지게 되고, 그렇게 꿈은 계속해서 커지고, 꿈에 대한 동경만이 커져 갔다. 현실적인 계획은 미뤄지게 되었고.

근 6년 만에 여행을 계획했다. 어딜 갈까 어딜 갈까 하다가, 대만에도 해변이 있고, 그 해변에서 서핑도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고, 그래서 망설임없이 대만으로 정했다. 다만 날짜가 문제였다. 나는 곧바로 8월달 광복절 연휴를 예상했고, 가격은 상관이 없었지만 문제는 가는 것 오는 것 비행기표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쩔수없이 9월단 추석 연휴를 예상했는데, 추석 연휴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추석 전후로 해서 비행기표가 많이 남고 또 가격도 저렴했다.

거기다가 추석이 바로 지난 직후의 대만에서는 대만 탱고 마라톤이 진행되는 게 아닌가? 내가 평소 좋아하던 아티스트인 세바스티안 아챠발도 온다고 하고, 저녁 내내 밀롱가가 진행된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또 없는 듯해보였다.

문제는 서핑이 하고 싶어서 가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대만 탱고 마라톤에 맞춰서 여행 일정을 알아보는 내가 있던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머리가 아파져서 잠시 계획짜는 건 멈추었다.

그러면서 문득 느낀건 정말 여행이란건 꿈보다는 현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꿈꾸면 꿈꿀수록 여행과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리한 현실과 짜증나는 계획 세우기에 봉착해서야 여행과 가까워졌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통장에 쌓인 돈으로 어떻게 얼마를 써야 할지를 계산해야겠다. 항공권에 얼마를 쓸 것이고, 언제 출발해서 언제 돌아올 것이고, 어디를 가서 얼마를 쓸 것이며, 밥은 얼마 어치를 먹고, 잠은 얼마 어치 숙소에서 잘 것이며, 해변은 어딜 갈 것이고, 서핑은 어디서 할 것이며, 대만 탱고 마라톤엔 갈 것이며 말 것이며, 유명 관광지를 꼭 갈것인지, 로컬의 문화를 그저 즐기다 올 것인지.

현실적인 고민으로 머리가 하얗게 샐 것만 같지만, 그래서 30대의 첫 해외 여행에 부쩍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여행 책도 에세이도 티비도, 멀리하려 한다. 꿈을 꾸게 하는 건 좋지만 가끔은 꿈이 너무 커져서 거기에 안주하게 되더라. 이제, 다시 여행을 계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