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명이지만 작가의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이 더 지났다. 라디오 작가였고, 브랜드 스토리텔링 작가이고, 출간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고도 무명이라는 게 어쩐지 서럽긴 해도 아무튼 작가라는 명함을 달고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책을 사이에 두고 작가와 독자를 이분법으로만 나눈다면, 아무래도 작가는 독자보다 ‘글을 많이 쓰는 자’ 일 것이다. 똑같은 분량을 읽더라도, 독자는 읽기에서 끝날 수 있는 독서이지만 작가는 또 뭔가를 써야 직성이 풀리는 입장이므로. 나도 그렇게 자꾸 쓰며 지냈다. 틈틈이 시를 써서 공모전에 응모하고, 에세이를 써서 책을 출간했다. ‘싸이월드 감성’의 읽기 민망한 글이나 분노 배설용 육두문자, 은근히 자랑 섞인 재수 없는 글까지 모두 포함해서 꾸준히 뭘 쓰기는 써왔다. 무릇 작가라면, 뭐가 됐든 일단 쓰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에세이 출간 후 몇 차례의 북 토크를 진행하는 동안, 한 책방지기로부터 의미심장한 얘길 들은 적 있다. 내 책을 유심히 살펴보고 다정한 응원의 말까지 건네던 그 분이 인사 끝에 흘리듯 던진 말. “근데 요즘은 독자보다 작가가 많아서, 참 이게 좋은 건지 어떤 건지…”

듣고 보니 꼭 맞는 말이었다. 출판시장이 전에 없이 활발하긴 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SNS에는 열혈 독자들보다는 열혈 작가들의 소식이 더 많았다. 독립 출판이 대중화되면서 애살맞고 부지런한 글쟁이들은 등단의 과정 없이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예비 작가’의 영역에만 머물 뻔 했던 많은 사람들이 우수수 ‘출간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출판 시장이 어찌 보면 기형적인 구조인 셈이다. 보통은 수요에 따라 공급이 결정되는데, 지금 출판 시장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더 많다. 심지어 그런 세태가 쉽게 꺼지기는커녕 더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다른 공산품이 아니라 ‘책’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책을 출간하는 목적 중 ‘돈’은 1순위가 아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인세도 많이 받고, 전업 작가로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다들 안다. 출간 2달여 만에 20만부 이상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여행의 이유」의 소설가 김영하처럼 인세만으로 풍족한 인세를 받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인세를 10%로만 계산해도 20만부면 2억이 넘는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작가들은 왜 책을 출간할까.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퍼스널 브랜딩을 위해서 그럴 듯한 책 한 권이 필요할 수도 있다. 혹은 애초에 책을 강연 교재처럼 구성해서, 책 판매보다는 강연 기회를 확보하려는 목적인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세 외의 소득을 목적으로 한 출간이다.

그런데 이 출판 시장의 특이점은 ‘소득이 목적이 아니거나, 돈을 벌지 못한다고 해도 괘념치 않는’ 작가들이 꽤 많다는 데에 있다. 어떤 이들은 그냥 기념으로 책을 내기도 한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가져보는 것은 꽤 의미 있으니까. 그런 경우 보통 연이은 출간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꽤 많아서, 어쨌든 출판 시장에서의 총 공급량은 그렇게 또 늘어난다. 또 어떤 이들은 자본도 충분하고, 글에 대한 애정도 강해서 팔리건 안 팔리건 계속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모두 독립출판이 대중화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수요보다 공급이 활발한,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은 출판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출간의 목적 중에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것이 절대적으로 1순위다. 나는 전업 작가를 목표로 20대를 바쳤다. 문학적인 글 말고도 외주 작업으로 글밥을 먹고 있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누군가의 요구에 따라 써야할 글’ 말고 ‘내 가치관에 따라 쓰는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적으로 나를 담아낸 글들을 엮은 내 책이 잘 팔리길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SNS를 하고, 안 찍던 사진도 찍고, 발품 팔아가며 북토크 일정을 잡는다.

북토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실제로 북토크에서 만난 참석자 중에는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분들이 꼭 몇 분씩 있다. 내 책을 잘 읽었다는 얘기와 함께, 자신도 이런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 읽기보다 쓰기가 더 활발한 시대. 그렇게 말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책이 많이 팔려야 하는 나 같은 작가 입장에선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화적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점도 많을 것이다. 읽기보다는 쓰기가 보다 능동적인 학습 형태이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능력일 테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더 많이 읽기보다 더 많이 써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읽기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쓰는 이유야 사실 너무 뻔하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무언가를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건 작가건 읽기와 쓰기가 병행되지 않으면 독서의 효과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읽는 동안 우리는 지식을 흡수하고 사고를 확장한다. 어휘력이 늘고 표현력이 섬세해진다. 특히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는 생의 역설과 모순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체득해가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깊이가 깊어진다. 그렇게 읽은 뒤에 쓰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날 때 무작정 쓰는 것의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읽는 동안에 우리는 이미 머릿속으로 쓰고 있는 중이다. 컴퓨터 화면이나 노트에 쓰는 것은 내밀하게 써둔 이야기들을 활자화하는 과정이다. 정말 문학의 신이 던져주는 영감을 낚아채는 천재가 아니고서야, 쓰기보다는 읽기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있어 글을 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에게는 ‘타인이 자기 자신을 표현해주었으면 하는 욕구’도 있다. 우리가 점을 보거나 역학원을 다니는 이유, 하다못해 조잡한 심리테스트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나에 대한 정보를 다 던져주고서 듣는 나의 이야기에 우리는 왜 그리 화들짝 놀라는 걸까. 심리테스트 목록에 ‘나는 정해진 시간에 알람 없이도 잘 일어나는 편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양치를 꼭 하고 자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미뤄져 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따위의 질문에 모두 ‘예’라고 대답했더니 그 결과로 ‘당신은 성실하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합니다.’라는 문장이 나왔다. 자, 이것이 놀랄 일인가?

책을 읽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듣는 행위와 닮았다. 달리 말해, 나의 입장이나 감정을 책을 통해 확인하고 공감하는 일이다. 그 과정은 일단 흥미롭고, 점점 위로가 되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쓰는 일이 자기 안의 이야기를 외부 세계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읽는 일은 외부 세계를 통해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글은 평면적인 활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입체적일수록 좋다. 특히 작가와 독자, 또는 독자들 사이에서 소통이 이뤄진다면 더욱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과 외부 세계를 드나드는 통로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필요한 것 역시 쓰기보다는 읽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글밥을 먹으면서 끊임없이 써대다 보니, 읽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인풋이 없으니 얼마 되지 않는 밑천으로 별 하잘 것 없는 아웃풋만 만들어내는 것 같아서, 다시 읽기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독자보다 작가가 많은 시대. 이런 시대에 글밥 먹겠다고 책을 출간한 내가 미련스럽다가도, 작가 역시 성실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얼마 전 SNS에서 초등학생이 ‘시인’이라는 시제로 쓴 이행시를 본 적이 있다. ‘시 : 인이 되려면 먼저 / 인 : 간이 되거라.’ 예술성과 도덕성의 관계는 오랜 난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초등학생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시인을 꿈꾸는 자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 역시, 읽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쓰기만큼 읽기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나는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읽지 않는 자, 결국 자신을 잃게 될 것이라고. 쓰기만 하는 자, 결국 자신의 밑천을 다 쓰게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