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을 어기지 마라

2002년 11월 6일,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고, 수요일이었으며, 다름 아닌 수능일이었다. 2002년에 고3이라니, 최악 중에 최악. 나를 비롯한 그 해의 남자학생들은 아마 그 해의 수능성적에 대해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하필 월드컵 때문에, 하필 워크래프트 3 때문에, 하필 야인시대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래 그렇게 우리의 합리화는 언제나 외부의 것을 끌고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의 수능성적이 바닥을 친 것은 과감히 말하건대, 결코 월드컵이나 게임, 야인시대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망친 수능의 8할은 그 놈의 ‘아침밥’ 덕분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아침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이가 얼마나 될까. 지금에야 건강을 이유로 먹는다지만, 2002년 당시에는 아침을 거르는 이들이 꽤나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시대였기에 ‘아침밥 먹기 운동’ 이라던지 ‘아침밥을 먹으면 두뇌활동이 좋아진다’는 각종 의학정보와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내 어머니도 그런 ‘아침밥’ 열풍에 그 누구보다도 열광하던 분이셨다. 그래서 아침밥을 꼭 해놓고 출근을 하시곤 했는데, 물론 나는 아침밥을 챙겨먹지 않았다. 고3 누구나 그렇듯, 아침잠은 늘 부족하고 일어나는 시간에는 늘 게으르다. 나 또한 그 시절엔 무척이나 게을렀다. 아침 입맛이 도는 사람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일 것이다. 입맛이 돌때까지 신체능력을 웜업 시켜놨을테니 말이다.

대부분의 내 또래 우리 학교 아이들이 모두 같았다. 그래서 늘 학교에 도착해서야 입맛이 돌았고, 1교시가 마친 후의 매점은 늘 아이들로 북적였다. 점심시간까지 두어시간 남았지만, 우리는 배고팠다. 1교시가 마치면 보통 9시-10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점에서 신나게 무엇인가를 먹고 한두시간 뒤에 우린 또 먹었다. 전봇대도 씹어먹을 나이, 그렇게 먹어도 배탈 한번 난적 없이 나는 고3을 보냈다. 수능 직전까지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능 당일 나는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 놈의 ‘아침밥 두뇌활성화 이론’ 때문이었다. 해놓은 공부는 없고, 아침밥의 탄수화물과 당분이 나의 두뇌활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줄 거라는 헛된 믿음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수능날엔 아침을 먹고 가겠다고 선언하기 까지 했다. 내 어머니는 옳다구나하고장을 보고선,  수능 당일 소불고기, 짜지 않은 국, 시금치, 콩나물 등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식단을 준비해주었다.

빠짐없이 꾸역꾸역,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침밥을 다 비워냈다. 든든했다. 뭔가 이 기분으로 수능을 잘 치를 수 있을 듯한 착각도 들었다. 다른 학교의 교문에 다다랐을때 후배들의 응원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두뇌 컨디션이 매우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데서 발생했다. 2교시 ‘언어영역’ 1교시를 마치자마자, 배가 부글부글 끓는다. 방귀라도 끠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 이것은 똥방귀다!’. 자칫하다간 새어나올 가능성이 농후했고, 소리와 냄새 또한 무척 심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시험지에 가 있어야 할 의식이 그렇게 부글거리는 내 대장과 직장을 부여 잡느라, ‘수리탐구’ 2교시는 1교시 ‘언어영역’에서 읽었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처럼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그 후 어찌하여 대학에 운좋게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이 일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리고 지난 6월 테니스 전설 라파엘 나달이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에서 통산 12번째 우승을 달성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내 수능날이 떠올랐다. 우승 그 자체가 아닌, 내 눈에 띈 나달의 ‘루틴’ 때문이었다.

나달만 루틴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명한 스포츠 선수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만의 이런 루틴들의 가지고 있다. 한화의 김태균 선수는 방망이를 돌리고, 리우 올림픽 여자양궁 금메달리스트 장혜진 선수는 활을 쏘기전에 반드시 루틴카드를 만진다.

이처럼 루틴은 불안, 긴장, 초조 등을 달래주는 데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그래서 루틴은 징크스를 깨는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과의 작은 약속을 지킴으로써 자기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컨디션을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리적 현상이었지만, 나는 아침밥을 먹고 가지 않는 것이 내 루틴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평소의 내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항상성’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그 루틴이 깨져버린것이다. 내 컨디션을 유지하는 경비업체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것은 ‘외부의 침략자’ 로 인식했을 터.

그래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면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을 때가 있다. 물론 예의를 차려야 하는 ‘비지니스 모임’이나 ‘소셜 모임’ 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평소 내 생활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래야 내가 편안하고, 스스로가 확신이 설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타인에게 조금 더 비굴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 더 내 주장을 과감하게 펼 수도 있을 것이며, 내 입지를 굳히기 좋은 컨디션이 될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위해 내 루틴을 바꾼다는 것, 이는 조금 비굴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