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했다. 올해까지만 프리랜서 극작가로 살기로. 내년부터는 취업을 알아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극작을 관두는 것은 아니다. 난 어차피 극작을 안하고는 못 살 인생이다. 이게 뭔소린지 아마 창작을 안하는 사람들은 가슴깊이 공감은 못하겠지만, 이제 나는 창작을 재밌어서 하는 수준은 넘어섰다. 창작은 늘 얘기했지만 고통스럽다. 창작의 고통 같은 고따위의 단어 자체가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창작은 정말 그냥 ‘하기 싫은’ 수준의 짜증과 예민함을 선사한다. 하기 싫은데도 하면서 사는 건 그냥 할 수밖에 없고 숨쉬듯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뭔가 창작을 안하고는 못배기는 인생이란건 실제 현실의 삶에서 메울 수 없는 절대적인 공허한 구멍이 있다는 것이고, 나는 아마 그 구멍을 평생 메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창작하는 건 그냥 무슨 일을 하건간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극자가라는 타이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앞에 ‘프리랜서’ 라는 글자가 빠지는 것일 뿐이겠지. 취업해서 일을 하는 극작가. 뭐 지금도 스스로는 극작가 겸 태극권사 겸 땅게로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꼭 굳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생업이면 너무 좋겠지만 굳이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는거니까.

그래서 올해까지 뭘 할거냐. 돈을 쓰기로 했다. 돈은 어디서 났냐 하면 여기저기서 났다. 정당하게 벌어서 획득한 돈도 있고, 빚이 억소리나게 있지만 아직은 그래도 용돈 줄만한 형편인 부모님 할머니 등등한테서 받은 돈도 있다. 돈 쓰는거야 평소에도 밖에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게 돈이라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쓰고싶은 데 돈을 쓰기로 했다. 원래도 딱히 돈쓰는데 죄책감따위는 없었지만 더 과감하게 쓰기로 했다. 안그래도 빡치고 열받고 스트레스받고 날도 더운데 내년부터는 이제 프리랜서 극작가도 안녕인데 올해까지는 어차피 일해서 돈벌면 못할거 다 해봐야되는 거 아니겠나.

왕복 20만원짜리 대만 타이페이 항공권을 끊었다. 추석때 끊으려고 했는데 추석 다음주가 더 항공권이 싸길래 특가 떴을 때 그냥 질러버렸다. 근데 어라? 추석 다음주가 대만 탱고 페스티벌이네? 탱고도 추고 밀롱가도 가고 대만 해변가서 서핑도 즐기고 일주일간 타이페이 관광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뭐 엄청 깨지겠지. 그래도 정말 신기한 건 스트레스와 자괴감이 정말 이빠이 들어차있던 머리가 20만원짜리 대만 항공권 결제하고 핸드폰에 전자 티켓이 딱 박힘과 동시에 2023년까지 확정돼있는 여권 유효기간을 확인하자마자 피가 싸-하게 도는 느낌이 들었단 것이다. 정말 그 싸- 하는 느낌과 함께 시원하게 머리에서부터 목뼈가 굳은게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뇌에 피가 통하면서 마사지가 되는 기분이랄까. 이런게 돈 쓰는 쾌감인가? 쇼핑 중독자들이 쇼핑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데 이런 기분일까? 쇼핑 중독자들은 쇼핑을 할거면 항공권이나 지르지 왜 홈쇼핑에서 티쪼가리를 10개 20개 사서 쌓아놓는 것이었을까? 별 되도않는 생각을 꼬리에 물면서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10만원짜리 손목시계를 질렀다. 군대에 있을 때 남성 잡지를 정말 마르고 닳도록 봤는데 특히 에스콰이어가 인기였다. 물론 그런 잡지를 본다고 군바리가 수트빨 세우는 젠틀맨이 될수는 없는 거지만, 아무리 말년 병장이 군인이어도 적어도 스킨로션을 바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등병 짬찌끄래기들과는 범접할 수 없는 처지였던 바, 우리는 군대 안에서 에스콰이어를 보며 그때만큼은 정장에 벤틀리를 끌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나이스 가이들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목장갑에 육공타고 작전지역 가서 사단장님 레토나 지나갈 진창길에 분쇄자갈이나 삽으로 퍼나르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손목에 있는 시계가 카시오 지샥 머드맨에서 태그호이어로 바뀌기를 꿈꿨다. 물론 전역하고나서 그게 얼마나 허황된 상상이었는지를 바로 깨닳았다. 지금은 상상은 공짜인데 효과는 만점인 걸 알기에 그시절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그 허황된 상상들에 감사를 보내지만, 전역하고 마주한 현실은 군대에서 후임한테 버리다시피 주고 온 머드맨을 다시 가서 찾아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었다. 더군다나 스마트폰에 시계 기능이 있다보니 점점 나는 손목시계에 대한 로망이나 환상을 접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요즘 거의 중독에 가깝게 된 스마트폰을 좀 적게 보기 위해 노력을 하던 차에, 시계를 보려고 스마트폰을 들췄다가 그대로 다시 스마트폰 중독으로 빠지게 된다는 걸 깨닳았다. 그래, 시계를 사자. 그래서 샀다. 손목시계, 어차피 길게 쓸거, 좋은거 이쁜거 사자. 스카겐 꺼 샀다. 사실 스카겐도 군바리때 에스콰이어에서 봤다. 이미 봐놨던 시계였다. 비싸다고? 내 지난 군생활 2년의 보상이 태그호이어도 안되서 스카겐이라도 되면 오히려 감지덕지인거 아닌가? 요새 끼고 다니는데 좋다. 비록 변변한 수입도 없는 프리랜서 극작가지만 왼손목에 감긴 스카겐 손목시게로 시계를 볼 때면 나도 대낮에 할 일이 생긴 사람 같이 느껴져서 너무 기분도 좋은 것이다. 아, 스마트폰은 정말 잘 안보게 됐다.

부산 광주 여행을 갔다. 부산도 광주도 탱고 동호회 선생님 따라 간 것이었다. 동호회는 어차피 사람들 휴가 시즌에 맞춰서 일주일 휴강이었고, 나도 탱고도 운동도 없는 일주일을 보내게 될 바에야, 그냥 선생님들 따라서 탱고 바캉스나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부산에 기차를 타고 가려다가 그냥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탔다. 뒤로 180도 가깝게 누워서 다리도 올리고 이리저리 뒤척대면서 기지개도 켰다가 팔걸이에 맘껏 팔을 기대도 옆 사람과 팔걸이를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독립된 자유로움에 미소가 씨익 지어졌다. 예전엔 그것도 아껴보겠다고 우등도 아니고 굳이 일반석 찾아타고 자면 되지 하면서 잠도 못자면서 그 이상한 기름 비린내가 올라오는 인조 가죽 시트에 앉아 멀미를 참으며 이동했건만, 이제는 프리미엄 고속버스가 아니면 우등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도착하자마자 한끼에 15000원짜리 삼계탕을 먹었다. 공복이어서 두끼같은 한끼를 먹는다 생각하고 두끼가격인 한끼를 먹었다. 줄서서 먹는 맛집이라 그런가 닭한마리가 실하게 들어있었다. 미친 듯이 탱고를 추고, 부산에서는 이튿날 서핑과 온천을 즐겼다. 하고싶다고 노래를 노래를 부르던 서핑이었는데 강원도도 아니고 부산에서 처음 서핑을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원래는 한 단락마다 돈을 어디에 썼고 뭘 했는지 쓰려고 했는데 서핑은 굳이 단락을 따로 빼서 써야만 하겠다.

서핑은 정말 행복한 경험이었다. 1회 강습에 6만 5천원이었는데 내 행복은 65만원어치 정도였다. 푸른 바다, 밀려오는 파도, 파도와 같이 나아가다가 파도의 정점에서, 파도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그 위치에서, 엄청난 속도를 받으면서 앞으로 쭉 밀고나가고, 서핑보드 위에서 올라서서 해안가를 향해 쭉 밀려나가는 그 기분은, 그냥 행복했다. 왜 서핑에 사람들이 미쳐가지고 여름만되면 바다로 홀린 듯이 떠나고, 어떤 인간은 직장도 그만두고 서핑샵 차려서 그 홀린 인간들 코묻은 돈 뜯어먹으면서 자기도 서핑하며 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온천을 워낙 좋아했기에 마 그 유명한 붓싼에 그 쎈틈씨티에 있는 신세계배카점 짓다가 터졌다는 은천을 찾아갔다. 신세계 스파랜드. 성인 가격이 무려 17000원. 심지어 1인당 4시간, 최대 이용시간은 연장해서 6시간으로 제한. 그래, 백화점 짓다가 온천이 터져서 만든 찜질방이라는데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나 온천 좋아하잖아? 이미 부산에서 첫날 둘째날까지만 20만원 가까이 써서 손도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단락 바꾼거 보면 알겠지? 아따 억수로 행복했다잉. 온천물은 정말 좋았고,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을 정도였다. 찜질방 내부는 그냥 시설 하나씩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1시간이 다 흘러갈 지경이었다. 동네 찜질방가서 베개 하나만 주이소 아저씨는 왜 2개씩 가져가는교 아따 아저씨 매트리스를 다 가져가면 다른 사람들은 뭘 깔고 자라능교 하면서 드잡이하고 실랑이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의 200개에 가까운 소파베드같은 침대들이 하늘을 향해 뚫린 통유리 창들을 바라보며 쫙 깔려 있었다. 1만 7천원에 이정도면 체감 행복도는 17만원 짜리 4성 호텔 온천 정도. 찜질방 식당에 딸린 음식도 비쌌다. 미역국이 무려 9000원. 근데, 맛있었다. 과연 그들은 신세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내가 재벌 아무리 까 봤자 사실 재벌들도 이미지가 있지 찜질방 장사하면서 그들이 식자재에 돈 아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는가. 잘 씻고 잘 쉬고 잘 먹고 잘 자니, 왜 1인당 4시간으로 제한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들어오면 그 누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겠는가.

부산에서 그렇게 서핑에 온천에 탱고를 연이틀 미친 듯이 춘 뒤 광주로 넘어가서는 먹는 사치를 부렸다. 첫날은 광주에서 담양으로 갈비에 비빔국수를 먹으러 갔고, 둘째날엔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여수로 밥과 커피를 마시러 다녀왔다. 차로 2시간 걸려서 간 식당에서 줄을 다시 30분을 서서 먹은 돌게장은 평소에 간장게장 잘 먹지도 않는 내가 밥을 3공기를 시켜서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커피는 동호회 사람들이랑 같이 뷰가 좋다는 카페를 굳이 찾아가서 사치스레 먹고 사진찍으며 놀았다. 케이블카는 시간이 없어서 타질 못했다. 그리고 또 미친 듯이 광주에서도 탱고를 추었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일상을 대비하기 위해서, 올 한해 동안만 프리랜서로 살면서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운동을 다 해보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오면서 무브먼트 플로우를 가르치는 체육관을 한달 16만원에 끊었다. 아, 이로써 내가 하는 운동은 탱고, 태극권, 레슬링, 무브먼트 플로우까지 총 4개가 되었다. 대낮부터 운동을 해야돼서 일찍 일어나고 밥도 일찍 먹다보니 정말 돈먹는 하마처럼 돈만 쓰는 주제에 마치 돈버는 직장인들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 까먹을 뻔 했는데 레슬링 때문에 레슬링 슈즈를 6만원 들여서 샀다. 요즘엔 마사지건이 땡겨서 알아보는 중이다. 여기까지 돈 쓴 내역을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는 ‘넌 돈 쓰는게 아니라 그냥 운동에 미친 것 같은데?’ 라는 말을 들었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돈을 쓰면서 느낀 건, 돈 쓰는 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거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에 돈을 쓰면 더 행복하게 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돈은 있는데 타이밍에 맞지 못하게 못 쓰다 보면 쓸데없이 참 괴로워진다는 것도. 그리고, 돈 버는 사람들은 다들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 그래서, 올해까지는 이렇게 돈이나 쓰며 지내보려 한다. 원래 버는 이유는 쓸려고 아니겠는가. 쌓아놔봤자 뭐하나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죽으면 노잣돈한다는 것도 다 미신이다. 그래봐야 자식들이 가져가겠지. 난 자식도 없으니, 이렇게 나를 위한 선물을 미친 듯이 주련다.

돈 쓰는게, 그렇게 힐링이더라. 뼈 빠지게 월급 모으면 사고친 부모님 빚갚는데 자동이체되는 우리네 청년 인생들에게 늘 하고픈 말은, 남 좋은 일 하지 말고, 우리 돈 쓰며 삽시다. 너를 위해 쓰세요. 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