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으로 결정한 전세 아파트에 들어온 지 벌써 5개월째다. 아직 봄기운도 완연하기 전이었는데 오늘도 폭염주의 문자를 받았다. 아직 몇 년 단위가 금방이라고 느껴질 만큼 시간 수축 효과를 체감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몇 개월쯤은 확실히 빨리 흘러가버리는 것 같다. 2019년도 벌써 절반은 훌쩍 지나버렸다. 내 나이도 31.5세를 넘어가는 중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공공임대 아파트다.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할 수 있고, 10년 동안은 전세로 살아야 한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거주하길 원한다면 시세 80% 가격으로 매입할 수도 있다. 개인 건물주를 상대로 한 계약이 아니다보니 전세 보증금으로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고, 보증금 떼일까 봐 불안에 떨 필요도 없다. 운 좋게도 올해 신축인데다가, 동이나 호수도 꼭 맘에 드는 집으로 고를 수 있었다. 대학 입학 이후로 근 10년간 고시원과 원룸 생활을 전전한 나로서는 이보다 더 만족할 수 없는 집이다. 다행히 함께 살고 있는 아름이도 같은 생각이다.

아름이도 대학 시절 왕복 3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통학했다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원룸에서 자취를 했던 이력이 있다. 아름이나 나나, 처음 원룸에 들어갈 때만 해도 행복에 겨웠던 기억이 난다. 고시원 살던 나는 훨씬 크고 깔끔하고 독립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4년 내내 통학하던 아름이는 가까운 곳에 자기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점에서 그랬다. 뭐, 결국 서로의 원룸을 워낙 자주 오가는 바람에 아파트로 이사하기 직전에는 같이 사는 모양새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러저러한 연유로 우리는 귀가할 때마다 “Home, Sweet Home~!”을 외친다. 한 명이 “Home~”하고 선창하면, 나머지 한 명이 “Sweet Home~!”하는 식이다. 매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이 공간이 우리의 보금자리임을 감사히 여기며 신발을 벗는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자려고 누워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감사하다. 아무 맥락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다가 ”근데 나는 여기가 우리 집이라서 너무 좋아.” 라는 얘길 해댄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천치는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부모님의 차가 외제차가 아니면 놀리는 세상이다. 심지어 그랜저를 타도 ‘그거(그랜저 거지)’라고 놀린다는 기사를 보고는 기함을 했다. 나는 아직 차도 없는데. 나 어릴 적만 해도 부의 상징이었던 그랜저가 거지라니.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인 아이들이 임대 아파트 사는 친구들을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놀리는 세상이다. 휴먼시아는 2006년 출범한 브랜드로, 대한주택공사에서 사용하다가 2009년 통합 LH주택공사의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LH주택공사는 2011년 5월부터 브랜드 사용을 중지했다. 공식적으로는 휴먼시아 브랜드보다 LH를 먼저 알리려는 전략적 판단이었지만, 심지어 당시 이지송 LH 사장이 직접 “휴먼시아가 못 사는 아파트로 낙인 찍혔다.”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휴거’ 인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같다.

그런 시국에 우리는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당장 출산 계획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당장 ‘고오급 브랜드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는 현실은 아니다. ‘그거’와 ‘휴거’라는 인식을 아이들이 스스로 깨우쳤겠는가. 못난 어른들의 인식을 보고 배운 것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 먼저 아닐까. 그렇게 원론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그거’와 ‘휴거’의 시대에 임대 아파트에 살며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면 될 일이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우리는 매일 “Home, Sweet Home~!”을 외친다. 한 가지 더 우스운 건 가끔 잠자리에 누워 두런두런 옛날 고시원, 원룸 생활을 회상할 때마다 자꾸 ”그래도 참 좋았다.“는 말을 하게 된다는 거다. 그건 아름이도 마찬가지여서 통학할 때나 원룸살던 때를 얘기할 때, 우여곡절 많았어도 마지막은 늘 ”그래도 좋았지.“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그 시절들은 정말 좋았을까.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학교 바로 앞 고시원에서 나는 새벽 3시까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해대던 614호 때문에 잠을 설쳐야 했다. 세탁이 끝난 빨래더미에서 툭 떨어지는 바퀴벌레 사체를 목격해야 했고, 한 번도 팔다리를 쭉 펴고 大자로 누워본 적이 없었다. 원룸으로 이사하고 난 뒤에는 또 어땠는가. 모기가 너무 많아 여름 3,4개월 동안은 밤새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다. 자다가 모기 소리에 깨서 불을 켜면, 늘 10마리 이상의 모기를 잡아내야 했다.

과거가 마냥 좋기만 하지 않았던 건 아름이도 마찬가지다. 당시 김해와 부산을 잇는 경전철을 개통하기도 전에, 아름이는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통학을 했다. 특히 요즘처럼 푹푹 찌는 여름에 타는 만원 버스란, 그야말로 밑반찬이 가득 들어찬 상태로 고장 난 냉장고 속이나 다름없다. 대학가에 위치한 원룸에 이사한 뒤로도 새벽가지 소주 병나발을 불어대는 대학생들의 혈기왕성한 소음을 피할 수 없었다. 바로 근처 골목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도, 폭행 기사가 난 뒤로는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항상 그 시절을 좋았다고 기억하는 걸까. 그건 순전히 편집의 힘 덕분이다.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우리는 완전히 수동적인 입장이지만, 기억을 선별하는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얼마든지 능동적인 입장이 될 수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마음대로 잊을 수는 없겠지만, 좋은 기억을 더 자주 들여다볼 수는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서향으로 난 고시원 창으로 지는 노을과 옥상에서 턱걸이를 하고 내려다본 캠퍼스의 모습, 같은 고시원에서 지내던 선배가 종종 챙겨주던 밑반찬과 간식 같은 기억을 더 자주 들여다본다. 처음 원룸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뿌듯함과 퀸 사이즈 침대를 두고도 大자로 누울 수 있었던 바닥의 서늘한 감촉을 먼저 떠올린다. 아름이는 고역 같은 통학 버스와 지하철에서 매일 1권의 책을 읽어낼 수 있었다며 참 좋았다고 말한다. 원룸으로 이사한 뒤로는 당연히 통근 시간이 짧아져 좋았다고 말한다.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도 항간에서는 ‘거지’라고 불리는 임대 아파트에 들어오고도 “Home, Sweet Home~!”을 외치는, 이런 무지막지한 긍정의 비결은, 바로 편집의 힘에 있다.

20대 때는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취업은 할 수 있을지, 작가로 살아갈 수는 있을지, 어느 지역의 어떤 집에서 살게 될 지 등등. 그런데 이제 30대의 앞날은 어렴풋이 큰 맥락이 가늠되기는 한다. 올해 12월에 예식장을 예약해두었으니 아마 결혼을 하게 되겠지. 3년, 3권의 출간 계약을 했으니 향후 2년간 2권의 책을 더 낼 수 있겠지. 빚을 지고 아파트에 들어왔으니, 아마 별일 없다면 여기서 살며 빚을 갚아나가겠지. 그 사이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여전히 예측불가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살아가겠지.

해서, 앞으로는 긍정의 조각을 선별해내는 편집의 힘이 더욱 발휘될 것만 같다. 닥쳐올 것이 분명한 시련의 구간들이 눈에 보이니까. 열심히 편집해서 고이 담아둔 감사와 희망의 서랍을 열면 되니까. 좌절과 정말은 기억의 사각지대에 대충 던져두고, 가끔 떠오를 땐 반면교사로 삼으면 되니까. 흔히 영화를 ‘극적으로 편집된 인생’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을 어떤 장르로 만들 것인지, 어떤 결말로 이끌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감독이자 배우, 편집자이자 관객인 스스로의 몫. 요즘의 나는 편집의 힘으로 매일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