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상관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면 학창 시절 미술실을 지나가면서 얼핏 보았을 석고상. 미술을 전공했던 사람이라면 수많은 석고상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이다. 원기둥, 원뿔, 구와 같은 석고 모형은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미술 시간에 한 번쯤은 그려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대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게 되면 석고 데생이라는 관문을 거치게 된다. 처음 석고상을 마주하면 대체 저 사람들은 뭘 하던 사람들이길래 석고상으로 만들어져 오랜 세월 미술학도들에게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석고상을 마주하던 학생이 아니더라도 석고상에 대한 궁금증은 있는 모양이다.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 주변 친구들이 꼭 물어보는 단골 질문 중 하나인 걸 보면 말이다. ‘석고상은 왜 다들 곱슬머리에 서양사람 외모인가?’부터 시작해서 실존 인물이 맞는지 하는 비슷한 질문들을 한다. 석고상들이 모두 서양 사람의 외모인 이유는 간단하게 설명된다. 서양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고상은 실존 인물도 있고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도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인물들을 우리는 왜 그리고 있으며 그들은 누구일까?

석고상을 그리는 수업방식은 17세기 중반에 설립된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초, 중, 고 교육은 일본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교육 방식이 정착되었는데 프랑스의 수업방식을 도입한 일본의 미술교육이 이때 함께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기본 석고 모형을 지나 대각면 이라고 부르는 얼굴만 있는 각진 석고상을 거쳐 목부터 얼굴까지 있는 입체 석고상을 만나게 된다. 기본 석고상으로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아그리파와 줄리앙은 실존 인물이다.

처음 만나는 아그리파는 로마 제국을 세운 장군으로 실명은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이다.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의 친구로 중요 전투를 이끄는 장군이면서 로마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그리파 석고상에서 남성적인 강인함이 느껴지는데 실존 인물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 인물의 묘사가 정교한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 만나는 석고상이라 그리기 쉬울 것 같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가장 어려운 석고상이기도 하다. 거기다 신기하게도 그리는 사람 얼굴을 닮는다고 하여 미대 입시생들에게는 마의 석고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는 ‘나’를 닮은 것이 아닌 진짜 아그리파 본연의 얼굴이 나올 때까지 그려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아그리파 그리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만나는 석고상이 줄리앙이다. 실명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살해되었다. 줄리아노의 형 로렌초는 미술사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미켈란젤로를 지원하며 이름난 예술가로 키워낸 장본인이다. 미켈란젤로가 줄리앙 상의 원형을 만들었고 원형의 얼굴 부분을 본떠 제작된 것이 우리나라 미술 시간에 쓰는 석고상이다. 로렌초의 영향으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 수려한 외모이긴 했지만, 줄리앙 상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는 설도 있다. 수려한 석고상 모습에 취하는 것은 잠시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대부분 줄리앙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모두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무심한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듯한 표정은 입술을 그리다 보면 왜 자꾸 생긋 웃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지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다.

기본 석고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비너스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잘 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라틴어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비너스 상은 ‘밀로의 비너스’ 얼굴 부분이다. 미의 여신답게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으로 줄리앙 같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없어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단정하게 뒤로 묶은 줄 알았던 머리카락의 구불구불한 곡선에 정신이 혼미해질 수도 있다.

큰 덩어리가 느껴지는 강인한 인상의 아그리파를 거쳐 조각 미남의 풍성한 곱슬머리를 지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이는 비너스까지 그려보면 어느 정도 데생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다음은 중형 석고상으로 넘어가기 전 아리아스 라는 그리스 공주님이 등장하니까. 기본 석고상을 그리며 붙은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동글동글 잘도 말려있는 고동 같은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쫙쫙 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