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와 문장을 순위별로 나열해보자. 엄마, 아빠, 안녕, 사랑해, 고마워 등 등. 최상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이나 또는 그 조금 밑 즈음에는 반드시 이런 문장이 있을 것만 같다. “아, 시간 참 빠르다.” 그리고 오늘 나도 그 빈도수에 하나를 더했다. 벌써 2019년도 8월, 「서른이 벌써, 어른은 아직」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나의 서른하나는 어느덧 서른둘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버렸다.

“아, 시간 참 빠르다.”라는 문장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상단에 위치할 문장을 꼽으라면 아마 “아,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정도가 아닐까. 아주 적확하게도, 요즘 내가 자주 뱉는 두 개의 문장이기도 하고.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흘러가는 동안, 나의 체중도 참으로 빠르게 는 탓이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체중의 상한선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70kg 초반을 유지하던 체중은 한 번 80kg 고지를 돌파하더니 기세를 몰아 90kg도 거뜬히 점령했다. 매일 거울로 자신을 살피는 일은 마치 계절이 변하는 일을 매일 관찰하는 것과 비슷했다. 어제와 오늘 또는 일주일 사이에 눈치 챌 수 있는 변화는 거의 없지만, 정신차려보면 푸르던 잎이 붉게 물들어 확실한 가을이 되고 마는 것처럼, 나는 정상체중에서 확실한 비만 체중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해서, 오랜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놀란다. “어? 너 왜 이렇게 살이 쪘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나태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나의 나태로 이루지 못해놓고서 ‘난 지금 내 모습이 좋아.’라고 하는 건 좀 비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누구나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이므로, 누군가가 진심으로 스스로를 만족하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 “저 사람은 자기 합리화하는 거야.”라고 예단하는 짓은 피해야 한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솔직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기상 직후 공복 체중 91.7kg을 웃도는 내 모습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만족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고, 더 본질적으로는 지금 모습을 초래하고 유지하게 만든 나의 생활과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보다 더 현실적으로는 당장 10월에 웨딩 촬영이 있고 12월엔 결혼식이 있다. 그렇다. 전 지구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문장이자, 가장 흔한 거짓말 중 하나인 “아,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를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정확한 체중은 알 수 없지만,(지난 11년 간 몰랐고, 앞으로도 나는 모를 것이다.) 나와 결혼할 예정인 아름이도 꽤 많이 체중이 불었다. 우리 둘이 함께 체중이 불었다는 건, 함께 잘 먹었다는 증거겠지. 아름이도 다이어트 의지를 다지기 위해 소위 ‘리즈 시절’ 사진을 찾아 화장대 옆에다 붙여두었다. 스물둘,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사진이다. 꼭 요즘 같은 한여름 땡볕에 보수동 책방 골목의 허름한 책방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다. 소라색 스커트에 하늘하늘한 흰색 블라우스. 볼 때마다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진정한 리즈 시절의 사진.

화장대 옆에 붙여놓진 못했지만, 내게도 그런 리즈 시절의 사진이 있다. 지금의 추억의 뒤안길에 담벼락 낙서처럼 방치된 싸이월드 미니홈피 갤러리에 비공개 사진으로. 공교롭게도 2010년 7월, 나도 스물둘이었을 때다. 아마 체중이 겨우 70kg 넘길 정도였을 것이다. 부대 체련단련실에서 단련한 얇고 매끈한 실전 근육들이 나름 그럴 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얼굴이 나오지 않은 사진이라 덜 민망하다. 보나마나 뻔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음, 좀 봐줄 만한데?’하는 오만하고 재수 없는 표정. 으,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어렵지만 그래도 몸매는 꽤 봐줄만했다. 우리 둘의 리즈 시절이 같은 해였다는 걸 보면, 다시 한 번 우리가 함께 잘 먹어왔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야 그 시절 사진을 보며 ‘내가 왕년에 참 괜찮았는데…’하며 리즈 시절 운운하지만, 정작 그 때를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스물둘에도 8월 즈음에는 “아, 시간 참 빠르다.”라고 말했다. 지금보다 훨씬 체중이 덜 나가는, 성인이 된 후로 인생에서 가장 날씬했던 그 시절에도 우리는 “아,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라고 한탄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찰까.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9년 만에 20kg이 찐다고? 에라이 못난 놈아.”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줄 말이라고는 “야, 너도 나이 들어봐. 서른 넘으면 나잇살 무시 못 한다.”정도의 비겁한 푸념뿐이겠지.

고은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내려갈 때에만 ‘그 꽃’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지나고 나서야 호시절을 깨닫는 걸까. 그렇다곤 해도, 이제 와서 “내가 왕년에 말이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꼰대 같기도 하고, 너무 초라하니까. 왕년에 말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 내 인생의 ‘왕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가 왕년에 얼마나 잘났었는지를 시간 내어 듣고 싶지 않다. 진짜 대단한 사람들은 자기 입이 아니라 세간의 입들이 그의 화려했던 왕년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왕년의 리스 시절 사진을 볼 때마다 “하… 내가 왕년에는 참.”하는 못난 마음의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러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또는 살을 빼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누구에게 토로하지는 않더라도, 지속적인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지금 내 모습에 짜증도 나고 가끔 슬퍼지긴 해도 그리워할 왕년, 인생의 리즈 시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것이 비단 체중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식의 왕년, 열정의 왕년, 사랑의 왕년, 인류애의 왕년 등등. 봄맞이 대청소 하듯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고 보살피다 보면 누구나 이런저런 왕년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엔 상념에 젖고 회한에 빠지겠지만, 그것들을 잘 보이는 곳에 놔두고 자신을 더 사랑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더 사랑하고 싶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데에도 고갈되지 않는 동력이 된다. 왕년의 리즈 시절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것이지만, 더욱이 과거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비겁한 꼰대가 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왕년 활용법’인 셈이다.

요즘은 ‘리즈 시절’이라는 단어가 ‘찬란하고 화려했던 왕년의 한때’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해서 그 유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을 텐데, 사실 ‘리즈 시절’은 축구와 관련이 깊다. 2018년 은퇴한 영국의 축구 선수 앨런 스미스. 1980년생인 그는 18세부터 ‘리즈 유나이티드’라는 팀에서 프로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즈를 4강으로 이끄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탄탄한 기본기와 승부욕, 투지, 카리스마로 어린 나이에 많은 관심을 받게 되면서 2003-04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맞다.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 ‘박지성’으로 유명한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승장구를 이어갈 것만 같던 앨런 스미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후 심각한 발목 부상과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 그때 많은 축구 팬들 사이에서 “앨런 스미스는 리즈 시절이 최고였지.”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이후 다양한 드립으로 변용되고 활용되면서 ‘리즈 시절’은 고유명사화 되었다.

앨런 스미스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딱히 궁금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한다. 몇 번의 팀 이적을 했고, 그 와중에 경기력의 기복이 있었고, 선수 생활 이후 코치로도 활동했다는 정도로만 정리해두자. 앨런 스미스는 세간의 ‘리즈 시절’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분이 나쁠까. ‘내가 왕년에, 리즈 시절에 참 잘 나갔는데.’라며 상념에 젖을까.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동네 아저씨들 앞에서 “내가 어? 리즈 시절의 앨런 스미스인데 어?!”하면서 꼰대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만약 앨런 스미스도 내가 생각한 ‘왕년 활용법’을 잘 적용했다면, 리즈 시절은 그가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계기이자 사랑하고 싶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데에도 고갈되지 않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앨런 스미스의 최근 근황은 이렇게 나와 있었다.
‘최근 은퇴 후 취미로 서핑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나도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을 살피며 즐겁게 잘 늙고 싶다. 앨런 스미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