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신의 절망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혼자 해결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하거나. 전자의 경우 각자의 성향에 따라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김연수 소설가처럼 달리기를 할 수도 있고, 나처럼 헬스장으로 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도 있다. 에어컨을 틀어두고 이불을 덮은 채로 낮잠을 자거나, 뜨거운 물을 틀어두고 오랫동안 샤워를 하면서 자원을 낭비하는 것도 때론 괜찮은 위로가 된다. 그 외에도 맛있는 음식 먹기, 음악 듣기, 책 읽기, 청소하기 등등 각자의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간에 약간의 시행착오만 거치면, 혼자 해결하는 이 방법은 높은 확률로 성공적이다.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페이스를 따라 기분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디 사람이란 사회적 동물. 혼자 해결하는 방법은 절망과 우울의 변두리를 말끔히 해줄 수는 있으나 그 가운데에 박힌 외로움을 다루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 분명 기분인 나아졌는데, 어쩐지 헛헛한 마음. 힘들 땐 힘들다고, 괜찮아지고 나면 이제 괜찮아졌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 누군가 먼저 알아채고 말을 건네주길 바라는 그 모순적인 마음의 중심에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은 후자의 방법, 즉 누군가를 찾아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절망과 우울에서 벗어나려 한다. 유난히 힘든 날, 앞뒤 맥락도 없이 술 한 잔 하자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물론 자정 넘어 헤어진 애인이 보내는 “자니…?” 따위의 메시지가 주책이지만.

그런데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은 매번, 매순간 통제 불능의 변수가 끼어든다. 우선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도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긍정적인 친구와 대화하는지, 부정적인 친구와 대화하는지에 따라 나에게 던져지는 조언의 내용은 극단적으로 달라지니까. 심지어 매번 같은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 사람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서도 대화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행복한 연애를 하며 결혼을 꿈꾸던 친구가 가슴 아픈 실연 이후 비혼주의를 선언했다면, 실연 전후로 그 친구가 사랑에 대해 내게 전하는 메시지는 판이해질 테니까.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가 퍼지는 모양처럼, 섞이긴 섞이되 그 형태는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절망과 우울을 떨쳐내고 싶을 때 다시 두 가지 노선을 기대한다. 나와 함께 비관에 젖어 울어줄 것인가, 희망의 메시지로 내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중요한 건 어느 쪽이든 해결책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내 일은 스스로 해결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와 공감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나도 한땐 ‘함께 비관에 젖어 울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 이 세상에 엉망진창인 삶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 어쩌면 나보다 더 비극적인 삶도 수두룩하다는 위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사람도 겉은 멀쩡하지만 속으론 곪아본 적 있다는 동지애. 그러다 보면 주량을 훌쩍 넘겨 술을 마시게 됐다. 씁쓸함이 가득 배어있는 웃음을 지으며 허정허정 집으로 걸어가는 길. 속이 후련한 듯싶다가도 금세 또 막막함과 외로움이 차오르던 기억. 주로 대학생 때 자주 그랬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런 같잖은 체념을 버릇처럼 내뱉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엔 절망과 우울을 떨쳐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반쯤은 그런 상태를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희망의 메시지로 내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더 좋다. 물론 다 잘 될 것이라는 무책임하고 막연한 위로는 사절이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조적인 태도는 경멸한다. 진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뿐인데 그 안에 희망과 감사가 담겨있다. 그럴 때 듣는 사람은 저절로 희망을 갖게 된다. 나보다 더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나와 다르게 행동했구나.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러면 저 사람처럼 멋진 인간이 되는 거구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술은 오히려 많이 마시지 않게 된다. 대화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층 밝아진 표정과 말짱한 정신으로 집으로 걸어가는 길. 어쩐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고, 진즉에 내다버린 줄 알았던 희망이 손에 잡힌다.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해서 왠지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양상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허구한 날 불평, 불만을 쏟아내고, 비관적인 태도로 안 될 거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 누군가의 희망을 유치하다 말하고, 누군가의 성공을 운으로 깎아내리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라는 말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마지막엔 ‘우리’라는 단어로 함께 절망과 우울의 늪에서 뒹굴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기력이 쇠하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덩달아 기분이 처진다. 딱히 준 것도 없이 손해 본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반면에 별 것도 아닌 일에 행복해하고, 의미 없이 던진 호의를 잊지 않고 감사해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술 없이도 마음이 부푼다. 매사 거창하진 않더라도 세심한 사람. 아쉬운 점보다 좋은 점을 기억하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참 좋았어,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기분이 환해진다. 딱히 준 것도 없는데 많이 받아가는 기분이 든다.

어제 아름이는 절친인 고등학교 동창을 오랜만에 만나고 왔다. 밤 10시도 전에 집에 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아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웃고 있었다. 만취한 건가, 싶었지만 마신 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친구와의 대화에 취해버린 것이었다. 거의 20년 지기 친구였다. 딱히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던 세월이었지만, 둘 사이에 행복한 순간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 친구는 생일을 며칠 앞둔 아름이를 위해 손편지와 손수 포장한 선물을 준비했다. 결혼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아름이를 위한 적금을 꼬박꼬박 넣었다며, 10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축의금으로 내겠다고 했단다. 아름이나 나나 참으로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인간들인데, 아름이는 참 잘 살았구나 싶었다. 자신을 저토록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니.

나이 들면서 인간관계에서도 계산적일 때가 있다. 나에게 득이 되는가, 실이 되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아직 득이 될 것 같은 사람에게 속에 없는 말로 친분을 쌓을 만큼 낯짝이 두껍지는 못하다. 하지만 실이 될 것이 확실한 사람을 거절하고 내치는 매정함은 날카로워졌다. 굳이 계산해보자면 내 인간관계의 수완은 제1금융권의 적금 이자율 정도인 것 같다. 매우 안정적인 인간관계. 아주 큰 이득은 아니지만 꾸준히 삶에 보탬이 되는 인간관계. 오랫동안 쌓이다보면 삶의 든든한 자산이 되는 인간관계. 내가 가장 힘들 때 한 번에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인간관계.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깨고 싶지 않은 그런 인간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