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감성에 젖어 취기처럼 적어 내려간 두서없는 시를 좋아한다. 과잉 감정에 빠져 손글씨로 빽빽이 채운 손편지가 좋다. 거기에 귀여운 하트나 꽃 그림이 있으면 더 기쁘다. 명언을 적어두고 오늘의 다짐을 명시한 플래너 한 귀퉁이와 소설 한 구절을 옮겨 적은 일기장의 어느 페이지를 사랑한다. 손으로 쓴 글이 아니래도 괜찮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차곡히 쌓아가던 게시판 글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둔 어떤 구절이나 말들, 블로그에 스크랩한 좋은 글귀 모음 같은 것. 아스라이 지나버린 추억처럼 문득 따스하던 기록들.

 

어느새 이런 것들이 듣고보기 못 참을 만큼 민망한 요소로 희화화되었다. ‘흑역사’라는 이름 아래 ‘손발이 오그라들어’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이르렀다. 나는 이게 좀 서글프다.

 

오글거린다는 단어가 변두리에 있던 시절, 풍부한 감성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멋들어진 글귀를 쓰고 낭만적인 말들을 나누며 표현의 깊이를 쌓아갔다. 그때 그 시절, 나 때는 말이야,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통신과 인터넷 보급화 이전 시대의 문화를 현재에 견줄 수는 없다. 연락과 만남, 소통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시대의 표현방식에도 매력이 있다. 위트 있고 담백하다. 직관적이고 빠르다. 재미있고 파급력이 크다.

 

다만 이 ‘오글거린다’는 말은 감성을 조롱한다. 오글거린다는 단어의 현재 쓰임새가 너무 싫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행위는 참 좋아한다. 유독 은유와 활유가 잦은 문장, 현실에 대한 직시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 실제보다 과한 감정, 각오는 끝내 죽음을 감내할 듯,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이겨낼 듯, 명언과 시와 노래가 동반되고 이를 통해 스스로 멋진 말을 만들어낼 줄 알았던 문학소년소녀들. 오글거림의 정체는 본래 이런 것 들이다. 오글거림의 정서는 사유의 깊이를 키운다.

 

오글거림이 지금의 오글거림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문학적 표현을 피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뇌피셜이지만 나는 이런 흐름이 현재 문학의 침체를 불러오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조어 역시 하나의 문화임을 인정하고 그 쓰임을 긍정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놈의 ‘오글’이란 단어는 도저히 예쁘게 보이지가 않는다. 오글 때문에 빼앗긴 감성이 아깝다.

 

오글거림을 되찾고 싶다. 오글거리는 말을 하고 오그리 토그리 한 글을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길 바란다. 그런 표현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예술인 것을. 아침에 일어나 부끄러워 지우고 싶을 만한 글을 게시판에 올리고, 풍부한 표현이 잔뜩 담긴 댓글을 달아보는 건 어떤가? 자극만큼 자성적 고찰이 담긴 그럴듯한 글을 SNS에 올려봐도 좋겠다. 감성충이라 해도 좋으니 손발 다 없어질 만큼 오글거리는 표현들 가득 담아서. 오글거림에 이유는 없다. 누구에게나 오글거리고 싶은 순간이 있고, 얼마든지 오글거려도 좋은 권리가 있다. 누가 내 타임라인을, 피드를, 게시글을 보고 오글거린다고 놀린다면 더욱 오글거리는 답글을 달아 경악하게 만들어주자. 그럴 거면 비공개로 쓰면 되지 관종 아니냐 할지 모른다. 관종이 맞아서 그런다. 표현이란 무릇 누군가에게 내비치고 단 한 명이라도 공감해주길 원해 하는 것이니까. 분명 오글거림에 목마른 사람들도 많으리라 확신한다.

 

풍성한 내면을 지닌 사람만이 오글거림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자꾸 표현하다 보면 정제되고 세련된 면모가 갖추어진다. 글이 정리되고 말이 다듬어지면서 작가가 되고 달변가가 된다. 이러한 면모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자산이 되는지 모른다. 오글거림은 흑역사가 아니다. 성장의 토양이 될 ‘흙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