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있다. (중략)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것이다.

–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서두에 인용한 러시아의 철학자 ‘베르자예프’의 문장처럼, 이 소설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자,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전체주의적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반유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다. 사실 유토피아라는 개념 자체가 전체주의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유토피아란 그 어원처럼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다.

토마스 모어에 의해 그 개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이상의 세계라는 것이 가능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개념의 시초가 되었을 뿐, 모든 것이 공유되고 통제되는 사회는 결코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유토피아란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는 세계로 남았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반 유토피아를 포함한다. 유토피아 자체가 그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미래에 인간이 유전자 조작 의해 모체 밖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병(bottle)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태아일 때부터 정해진 계급에 의해 지능이 조작된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회안정이며, 이를 위해 인간의 모든 욕구는 통제된다. 여기서의 통제는 억압과 제한이 아닌 욕구 자체를 무뎌지게 만들어 갈망을 제거하는 것이다.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이 모든 시민에게 배급되고, 가정을 이루지 않고 살아간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난잡한 자유연애를 한다. 인간의 욕구는 쌓이기 전에 적절히 배출된다. 누구도 열망이나 격정을 느끼지 않고 불안없이 완만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언뜻 이런 세상은 좋아 보인다.

허나 인간에게 목적의식과 욕망이 없다면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모두가 안전하고 똑똑한 사회는 어쩌면 유령들의 세계일지 모른다. 행복한 바보들의 세상을 지배하는 소수만이 모든 것을 통제할 뿐.

무미건조하고 소름 돋는 이 세계에 어느 날 야만인 구역의 ‘존’이라는 사내가 들어오게 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으며 ‘셰익스피어’를 읽고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그는 이 멋진 신세계의 풍요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존은 통치자에게 불편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통치자는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답한다. 이에 존이 죄를 원한다고 말하자 통치자는 불행해질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불행해질 권리가 바로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불행해질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동시에 행복할 권리까지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인간은 불행하기에 행복하며 불편하기에 안락함을 느낀다.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의거한 표현이지만, 소설에서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193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새삼 놀라운 것은 시험관 아기가 현실화된 지금의 과학기술을 그 당시에 정확히 예견했다는 데 있다. 공상소설이지만 터무니없는 상상력만 앞세운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정확하며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1차 대전 후 급속하게 발달하는 기계문명과, 전후에 대두된 전체주의적 정치체계를 연결시켜 그런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인간적인지 경고한다. 이는 실제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기도 하고.  진보와 평등을 위한 기술의 발달 역시 결국에는 전체주의의 확산에 기여하게 된다는 아이러니. 이를 통해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특이한 것은 헉슬리가 그린 미래상에는 기술공학보다 생명공학이 훨씬 발달해 있는데 이는 진화론으로 명성 높은 그의 조부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영향이 컸을테다. 게다가 그의 형 역시 생물학자였다. 이런 연유로 ‘올더스 헉슬리’는 생명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를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로봇과 대항하여 싸우는 터미네이터의 세계보다 무서운 세상일지 모른다. 인간의 적이 바로 인간이 되어 버린 세상이니까.

아직 소설 속 묘사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현실은 그 어떤 세계보다 멋지게 돌아가고 있다. 소수의 통치자들은 멍청한 머글들 위에 군림하며 세금으로 배를 불리고, 범죄자들은 어린아이를 상대로 맘껏 성욕을 채우거나 심심풀이로 사람의 살에 칼을 집어넣는다. 그럴지언정 고작 손바닥 하나 범위의 형을 살고 나오는, 인심 좋고 따뜻한 이 세상. 이미 세상은 충분히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