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없이 오랜 세월 아들과 단 둘이 살아온 엄마에게 아들이란 어떤 의미일까? 세상의 전부? 인생의 모든 것?

물론 그렇겠지만 살짝 이런 설정을 덧붙여보자.

그 아들은 지능에 약간 문제가 있어 스물 여덟의 나이에도 엄마와 찰싹 붙어 산다.
그 아들은 훤칠한데다 예쁘게 생겼다. 사진관 여자 말처럼 특히 눈이 예술이다.
그 아들은 엄마와 잠도 같이 잔다.
그 아들은 아직도 엄마 가슴을 만진다.
그 아들은 여자랑 자 봤냐는 질문에 엄마라고 대답한다.
그 아들이 아는 여자라고는 엄마 밖에 없다. 마찮가지로 엄마가 아는 남자라고는 그 아들 밖에 없다.

남편 없이 오랜 세월 ‘그런’ 아들과 단 둘이 살아온 엄마에게 아들은 단순히 아들에 불과 할까?

 

넌 엄마랑 자냐

영화는 여러번 엄마와 자는 아들에 대해 언급한다. 골프장에서, 경찰서에서, 폐허가 된 놀이터에서. 엄마와 아들이 함께 자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식을 품고 자는 어미는 숭고한 모습이다. 그러나 잔다, 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성은 드러내기 불쾌한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진태 : 너 여자랑 자봤냐? 에휴, 얼굴은 이쁘게 생겨가지고는… / 도준 : 나 여자랑 잤어. / 진태 : 여자 누구? / 도준 : 엄마.

 

제문 : 도준아, 너 어젯밤에 뭐했냐? (중략) 너 재수생 개 막 찝적거렸지? / 도준 : 그게..저… / 세팍타크로 형사 : 이 새끼가, 또박 또박. / 도준 : 잤습니다! 집에서! 엄마랑. / 제문 : 하하, 심플하네. / 세팍타크로 형사 : 근데 너, 엄마랑 자냐?
남고생 : 그 진짜 바보새끼는 아정이 빤쓰도 한번 못 본게 엉뚱한게 걸려가지고 / 진태 : 그만하자. / 남고생 : 근데 윤도준 지 엄마랑 잔다며요? / 진태 : 안 닥쳐? / 남고생 : 잠만 자나, 떡도 치나.

 

아들은 자라며 엄마와 함께 자지 않게 된다. 그건 단순히 독립적인 나이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릴 적엔 습관 처럼 주무르던 엄마의 가슴이 언젠가부터 만지기 머쓱해진건 가슴에 대한 다른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여자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는 시점부터 아들은 엄마와 자는 것이 불편해진다. 다 큰 아들이 엄마와 잠을 자지 않는 건 여자로부터 엄마를 구분짓기 위해서다. 그때부터 아들은 엄마의 자리에 대신 뉘일 여자를 찾게 된다.

이런 행위를 우리가 인식하고 행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면에 덮어 둔 예민한 ‘이유’를 영화는 툭툭 건드린다. 차마 생각만으로도 죄스런, 보기 싫고 추악한, 그러나 우리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을 말이다.

소변보는 아들의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엄마와 술집과 골목에서 여자를 만나고 난 후 집에 돌아와 엄마 가슴을 만지는 아들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나 뿐일까?

엄마 역시 아들이 불편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들과 목욕탕도 함께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아들 앞에서 옷 갈아입는 일이 껄끄럽다. 아들이 한 여자 옆에 남자로서 어울릴 나이가 되면 엄마와 아들도 남녀의 예의를 차리게 된다.

그러나 도준은 몸은 다 컸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아서 엄마가 하나하나 챙겨주어야 한다. 엄마는 과연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왜 엄마는 소변보는 도준의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 본 걸까? 그 장면에서 도준의 소변 줄기가 유난히 세다. 엄마가 벽돌로 덮으려 했던 것은 도준의 소변자국일까 아님, 떠올라선 안될 어떤 상상일까?

진태와 미나의 섹스를 훔쳐보던 엄마의 발끝이 오므라든건 단지 숨어있었다는 이유 때문일까?

 

그럼 넌 엄마랑 안 자냐?

감추어야 하거나 인정해선 안 될 부분들이 있다. 엄마와 자는 문제 역시 그런 부분이다. 엄마와 ‘자는’ 것이냐 ‘엄마와 자는’것이냐 하는 문제.

대부분의 아들이라면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쯤은 엄마와 관계하는 아들에 대한 야설을 접해 보았을 것이다. 우연히라도 말이다. 반윤리적인 그 텍스트를 역겹게 생각하면서도 왜 끝내 다 읽어 내려갔던걸까? 읽으며 그 아들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런걸 인정한다는건 스스로가 미친인간임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럴 때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다. 드러내선 안 될 부분을 애초에 없었던 것 처럼 잘라내고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면책받게 된다. 나는 정상이다라는 안도감.

 엄마랑 자는게 왜? 그런 쪽으로 생각하니까 그러지. 생각하는게 어쩜 그 모양이냐. 그럼 넌 엄마랑 안 자냐?

다 큰 아들이 어머니 가슴을 만지는 모습을 따뜻한 모성으로 바라보려 애쓰는 이면에는 내심 초조한 마음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나아가 ‘그런 의미’ 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 할 수 없없기에.

이런 미묘한 심리는 죄책감을 이끌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생각조차 불손한 것이기 때문에.  불편함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들을 황급히 덮어 버린다. 표면적인 것만 보려 애씀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구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쪽의 문제

사실 도준과 엄마는 그저 모정일지 모른다. 그래, 그럴 것이다. 문제는 항상 바라보는 쪽에 달려 있다. 만일 도준이 정상적인 아이였더라도 엄마와의 모습들이 묘하게 보였을까?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면 그 시선엔 이미 불손한 무언가가 배어있었을지도. 같은 장면을 5살짜리 꼬마아이가 보았다면 아마 엄마와 아들 이상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햇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이 그저 불손하기만 한 걸까?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는 부모자식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묘한 심리가 숨어있다. 한국 사회에선 더 심하다. 다만 그것은 드러낼 수 없는 일종의 금기 이기에 감추어 질 뿐, 내면 깊은 곳에는 아들에게서 남자를 보는 엄마와 엄마에게서 여자를 보는 아들이 있다.

극중, 엄마가 도준에게 한약재를 다녀넣은 삼계탕을 먹이며 정력에도 좋겠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정력 어따 쓰게 우리 아들? 하고 묻자 도준은 여자, 라 답하고,  엄마는 잤단 봐라, 하며 만나는 여자에 대해 장난처럼 캐묻는다. 여기엔 며느리 감으로서 아들이 만나는 여자를 궁금해 하는 엄마의 마음보다 내 남자가 만나는 다른 여자에 대한 질투가 숨어 있다.

남편 없는 엄마에게, 더욱이 바보스러운 도준은 어떤 아들보다 의미가 남 달랐을 것이다. 도준은 엄마에게 평생 보살펴야 할 존재이며 그것은 남편의 부재와 맞물려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 일면 도준에게서 남편의 역할을 바랬을 수도 있겠다. 엄마는 도준을 위해 존재 하며 도준은 엄마 삶의 모든 의미다.

때문에 도준을 잃는 것은 엄마에게 자식 이상의 것을 잃는 일이다. (자식 이상의 것이 있겠느냐만) 엄마가 되찾으려 하는 건 자신의 남자일수도 있다.  도준은 일면 그런 엄마의 간섭과 구속이 부담스럽다.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것으론 부족한 일련의 욕구를 배출할 곳이 필요하다. 도준은 끊임 없이 엄마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엄마는 끝까지 도준을 놓지 않으려 애 쓴다.

이런 심리는 정도의 차이일 뿐, 사실 모든 모자 사이에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모성이라 불릴 때 숭고함을 획득할 따름. 감히 모성을 남녀에 빗댄다는 건 반 인륜적 행위로 여겨지지만 그런 터부 자체가 문제도 아닐 것을 문제로 만들고 있는 측면이 있다. 어찌 되었든 근본적으로 엄마와 아들이 남자와 여자라는건 자명한 일이고 서로에게서 이성을 보게 되는 건 당연하다. 아들은 엄마를 닮은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고 엄마는 대체로 며느리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것이 왜 생겨났겠는가?

바라보는 쪽의 문제라는 건,
엄마와 아들을 남자와 여자로 보게 되는 시선이 아니라
그 모습을 불손하게만 여기는 금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정말 아들과 관계하는 어머니를 상상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단지 서로에 대한 이성적 측면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다 자란 아들의 모습에는 사랑하는 남녀의 헤어짐이 반영된다. 영화가 끝날때 엄마의 짐을 들어주며 터미널 까지 배웅하는 도준의 모습은 남녀의 이별과 닮았다. 엄마를 떠나보내며 도준은 자신을 구속하던 여자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엄마는 남편에 이어 또 한번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고.

아들은 홀가분하게 다른 여자를 찾을 테고 점차 엄마를 잊겠지만 엄마는 그런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침을 박아 넣는 엄마의 심정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저지른 살인의 기억을 잊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남자로서의 아들을 잊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모성에 대한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그런것도 다 모성이고 엄마로서의 사랑과 여자로서의 사랑은 습자지 한 장 차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야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이건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남자를 향한 여자의 마음은 때론 죽음도 불사하지 않던가.

정리

여기선 섹슈얼리티로 영화를 풀어보았지만 이 영화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내포된 의미가  많은 영화다. 일례로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 인터뷰에서 말한 것 처럼, 대한민국의 사법기관은 과연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도 이 작품에 담겨있다. 아무라도 범인만 나오면 된다는 얼버무리기 식 수사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바보 캐릭터. 도준의 무죄를 증명하려 고분분투하는 엄마를 보며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도준의 무죄가 증명되길 바랐겠지만 실은 도준이 범인 이었음을. 그럼에도 엄마의 바람처럼 무죄로 풀려나고 대신 잡혀들어온 진범은 도준보다 더한 다운증후군적 인물. 부조리에 부조리가 얹혀진 설정들은 불합리한 사회의 시스템을 조롱하고 있다.

더불어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오프닝과 엔딩, 뒤틀린 웃음을 유발하는 엄마의 춤은 서글프고 허망하다. 빈번하게 사용되는 빅클로즈업 샷과 투박하고 거친 소리들도 간과 할 수 없는 요소다. 서걱서걱 작두로 약재를 써는 엄마의 손가락은 얼마나 불안을 극대화 시키는가? 곳곳에 장치가 배치되어있고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와 철저한 복선이 숨어 있다.

다만, 나는 이 영화를 조금 원초적인 측면에서 다뤄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편협하고 기분나쁜 감상평이 되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