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위로받고 싶어 한다. 보듬고 안아가며 서로에 의해 상처를 치유받는다. 생에 대해 미련이 있는 한, 사람과 사람은 필연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힘들고, 힘들다가 괜찮아지기에 조금 덜 힘든 이가 더 힘든 이의 속을 열고 맘을 들어가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렇게 위로는 품앗이처럼 오간다.

살며 숱한 위로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어긋남 없는 위로에 대해 고민했다. 잘 될 거야, 잘할 거야, 미래형 응원은 실체가 없어 맘에 닿지 않았다. 나도 알아, 지나면 괜찮아져, 회상형 공감은 아는 체 같아 기만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위로받을 준비가 안 된 인간일지도 몰랐다. 비뚤어진 스스로를 느낄 때마다 내 안의 우물이 썩어갔다.

살며 숱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의기소침을 이겨내지 못했던 건 위로가 우울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바람직한 위로의 방법은 바로 위로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위로에 대한 벽을 쌓고 그 어떤 도닥임도 뿌리치던 나날에, 나를 바로잡은 건 어떤 이의 ‘격려’였다.

격려는 말했다. 됐다고. 지금까지 잘했으면 되었고, 앞으로도 잘할 테니 되었다고. 여기까지 흔한 응원과 비슷했다. 그러나 구체적이었다. 내 맘을 안다 내려보지 않고 내가 했던 행동을 인정했다.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물어왔다. 의욕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심으려 하지 않았다. 과거에 간섭하지 않고 미래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고 저렇게 해왔던 지난 일에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고, 때문에 그 일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각토록 했다.

우울은 지난 경험에 긍정이 없어 다음 경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때 발생한다. 격려는 긍정이나 부정, 실망이나 기대 따위 지우고 그저 사건으로서 행동을 조망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짚어줄 따름이었다. 덕분에 나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를 북돋웠던 말들을 간직했다. 과거 어떤 지점에 매여있던 부끄럼과 죄책은 그저 그 일이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상황은 사람을 뒤흔드니까.

결국 나는 여기 격려가 무엇인지 명확히 써 내릴 수는 없다. 단어나 어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전하는 것이 말인지라. 분명한 건 어떤 위로는 우울감만 크게 만든다. 서툰 위로가 상처를 덧낸다. 위로가 동정이 될 때 비참함을 만들고, 조언이 될 때 반발만 키운다. 위로하는 입장에서 열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니고 귀다. 알려주는 것보다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고쳐주려 하지 말고 함께 고민하며 진심 어린 연민으로 상대를 너그럽게 바라볼 때, 그제야 제대로 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위로란 이렇듯 가까스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