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심 야박하다 말하지만 사람 사는 곳 기실 어딘 듯 다르랴. 서울에도 따스한 사람 많고 인심 후한 가게 곳곳에 있다.

연극하던 어린 시절 외상 술 먹는 것도 갚는 게 힘에 부쳐 반지하 자취방에 삼삼오오 모여 컵라면에 소주를 까곤 했다. 큰 사발 두어 개 사도 사람 대여섯이 몇 젓가락이면 동났고, 안주보다 소주 한 병 더 사는 쪽을 택했던 젊은 간의 우리는 맹물을 몇 리터씩 들이켜며 혈중 알코올 농도를 희석하듯 마셔댔다.

그런 나날, 어느 겨울 지방에 일이 있어 동료 한 명과 함께 나갔다가 강변 고속버스터미널로 복귀하니 지하철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다. 두 명 통틀어 주머니에 1만 7천 원이 전부였다. 대학로까지 택시비는 충분했다. 동료는 내 자취방에서 재우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든 연락해 얼마를 빌려 각자 택시를 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술이 마시고 싶었다. 이 시간에 돈 빌려달라 연락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내가 말했다. 동료는 긍정하며 택시비는 더욱이 아까운 거 아니냐고 답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거기’로 향했다. 없는 돈에도 첫차 때까지 소주 댓 병 비울 수 있는 곳. 강변역 포장마차로.

누가 먼저 어떻게 그곳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우리도 연극 선배를 통해 소개받은 곳이다. 테크노마트 건너편 버스정류장 앞 즐비한 포장마차들엔 호수가 매겨져 있다. 몇 번이었더라, 거의 10여 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하다. 당시에도 우리는 번호로 그곳을 외우지는 않았다. 눈에 익은 위치로 가늠했고 잘못 들어갔던 적은 없다. ‘거기’는 우리가 돈은 없고 분위기는 내고 싶을 때, 뜨끈한 국물 한 사발에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딸랑 떡볶이 한 접시 놓고 기본 서비스인 오뎅국물에 소주병만 쌓곤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오뎅 국물을 계속 리필해 주셨다.

다시 그날 밤, 1만 7천 원이면 소주 다섯 병 정도 마실 수 있었는데 우리에겐 빠듯한 양이었다. 떡볶이 한 그릇 시키면 소주 한 병을 포기해야 했다. 염치없이 물었다. 그냥 소주만 마시고 가면 안되냐고. 아주머니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심드렁하게 그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어묵 국물에 떡볶이까지 내주셨다. 우리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듣지도 않고 밥은 먹었냐 물으셨다. 우물쭈물하는 우리에게 돈이 없으면 술 말고 밥을 사 먹으라 핀잔주시고는 신라면을 끓여 한 그릇씩 따로 주셨다. 담엔 여럿이 와서 비싼 안주 팔아주고 가야 한다며.

마지막 손님이 떠나자 눈치가 보였다. 일어나려 빠르게 잔을 비웠다. 아주머니는 더 있다 가도 된다 하셨지만 이미 다른 가게는 거의 마감한 상태였다. 다음엔 백만 원어치 팔아드리겠다고 가게를 나섰다. 추운데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역사에 앉아있다가 첫차 타고 가라 당부하시며 아주머니는 종이컵에 오뎅 국물을 담아 쥐어주셨다.

이후 백만 원어치 팔아드리겠다는 약속은 얼추 지켰다. 한 번에 그렇게는 못 사 먹어도 주머니 사정 좋을 때 찾아가 푸짐하게 안주시켜 먹곤 했다. 몇 번은 회식도 거기서 했으니까, 합치면 백만 원은 족히 될 거다. 어느 겨울 젊은이 둘의 무례한 부탁을 따스함으로 받아주었던 포차 아주머니의 인심에 비할 가격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내가 경기도로 이사를 가서 ‘거기’에 가 본 지 5년은 되었다. 일이 바빠 일부러 멀리까지 가 술 마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바쁘다는 건 나름 좋은 일이지만 이런 낭만으로부터 멀어지는 건 좀 서글프다.  오래 지나면 잊힐 만도 한데 아직도 자주 생각난다. 언젠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언젠가 꼭 여유 내어 밤새 마시러 가야겠다. 아직 주인아주머니 그대로 계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