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창이를 알게 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내가 연극 연출하던 시절, 어떤 배우의 소개로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연극계와는 아무 상관없었고 각자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합류했다. 순전히 인간적인 만남이었다. 당시 민창이는 한 케이블 방송국에 막내급 PD로 재직 중이었다. 나는 방송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기에 대화는 공통점 없는 신변잡기 일변으로 흘렀다. 성격이 잘 맞아 이후로 종종 연락하며 지냈다. 만나다 보니 연출이라는 역할 상, 분야는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나누게 되었다. 점차 서로에게 기대는 면이 많아졌고 서로를 알아갈수록 기대하는 면이 커졌다.

 

우리의 우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떤 관계는 기어이 붙잡으려 해도 속절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큰길을 향하는 여러 개의 골목처럼 각자의 길을 걸어도 결국 만나게 되곤 한다.

 

나는 서른셋부터 방송 촬영을 시작했다. 연극하던 시절에도 카메라는 꾸준히 잡았었다. 외주 영상 제작일을 하며 연극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빠듯하게 메워냈다. 단편영화 작업을 통해 언젠가 영화계에 입성하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렇게 7년여, 예술인의 자유라는 허울 삼아 술 마시고 어울려 다니느라 실상 크게 이룬 것은 없다. 우연히 좋은 여자를 만나 우연히 아이가 생겨 우연치 않게 돈벌이가 필요했다.

 

당시 하던 영상일은 그저 주변 지인 일감들을 챙겨 월 몇 건의 제작이 전부였던 영세 개인사업자였다. 나는 대학로 생활을 정리하고 월급을 따라 직장에 취직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결국 프로덕션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하나 더 생겼고 월급은 빠듯했다.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주는 곳을 따라 직장을 세 번쯤 옮겼다. 주말을 이용해 행사 촬영이나 편집 아르바이트 등을 받아 어떻게든 발악했다. 그러다 하게 된 주말 아르바이트 중 하나가 방송 촬영이었던 것이다.

 

종편 채널의 시사프로그램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내게 할당된 카메라 한 대를 잡고 할당된 출연자 1명만 잘 잡으면 되었다. 하루 촬영료가 20만 원이었다. 괜찮은 수입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다른 촬영감독들 여럿과 알게 되었는데 방송업계의 여러 면모를 얻어 들었다. 알고 보니 방송 촬영 감독들은 대부분이 프리랜서였고 일당도 내가 받는 것보다 많았다. 나는 파견업체를 통해 들어온 것이라 수수료가 높았던 것이다. 이런 부분을 몰랐던 나는 안내도 없이 수수료를 떼었던 파견업체에 항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방송 경력 없는 내게 당연한 일이라는 말 뿐.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주말마다 고정으로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에는 내 사정이 간절했다. 부족한 생활 탓에 부조리함을 견디며 1년여를 계속 다녔다.

 

어느 날 한 감독이 인터넷에서 본 어떤 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듣다 보니 내 칼럼이었다. 그는 내 필명과 내가 썼던 여러 개의 글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또 우연히 정민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이후 정민이를 통해 다른 감독들과 친구가 되고,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 촬영에 불리어 나갔다. 가만히 앉아있는 스튜디오 촬영과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눈치 빠르게 자기 그림을 찾아야 했다. 현장은 끊임없이 돌발상황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알아서 처신하는 센스가 필요했다. 카메라를 오래 만졌다고 해서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촬영에 바로 투입될 방송 년차가 아니었지만 동료 감독들의 배려와 가르침 덕에 그나마 버텨나갔다. 수수료 없이 바로 일을 받게 된지라, 한 달에 열 번만 촬영을 나가도 회사에서 받던 월급보다 많았다. 과감히 퇴직하고 프리랜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1인 프로덕션을 다시 오픈했고 방송 촬영일과 개인 외주제작을 병행하며 차츰 자리를 잡아나갔다. 정민이가 속한 촬영팀과 두루 친해지며 나름의 소속도 생겼다. 우연히 들어간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들이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 사이 민창이는 예능 메인 PD가 되어있었다. PD계에서 학벌은 무시 못할 요소고 케이블과 공중파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고졸에 케이블로 시작한 민창이는 공중파 메인 PD가 되어 자기 꼭지를 책임지는 정도까지 도달했다.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던 어린 PD는 이제 프로그램을 골라 들어갈 수 있는 베테랑이 되었다. 그 사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과정이었을 테다.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종종 만나 어깨를 기대었다. 내가 방송일을 시작했을 때 민창이는 썩 기쁜 눈치가 아니었다. 술만 조금 들어가면 내게 작품을 하고 연출을 해야 한다며 제 일인 듯 푸념했다. 한데 어쩌랴, 시절은 이미 지났고 허송으로 보냈으니 다잡고 앞을 바라볼 수밖에. 늦장이었지 늦은 것이 아니라고, 먹고살 것에 대한 걱정을 덜고 나면 다시 기회를 찾아보겠다는 약속으로 민창이를 달래었다. 애초에 내 일이지 제 일도 아닌데 왜 그 녀석을 설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달 민창이와 술을 마시다 우리 팀이 새로운 프로그램 촬영에 투입된다는 이야기를 알렸다. 민창이도 새 프로그램에 들어간다고 했다. 시기가 같더라. 말하다 보니 설마,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직전에 하던 프로그램이 민창이 선배가 총괄 PD고, 그 선배와 친한 메인 촬영감독이 우리 팀이다. 그 두 사람은 다음 프로그램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그 프로그램에 민창이가 메인 PD 중 하나를 맡은 것이다. 예능은 한 프로그램에 메인 PD 서넛이 회차를 나누어 담당한다. 그중 책임자급 PD가 촬영팀을 섭외한다. 이는 촬영감독들도 마찬가지로 메인 촬영감독이 프리랜서 감독들과 팀을 꾸려 투입되는 것이다.

 

민창이와 나는 알게 된 지 10년여 만에 처음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로 만날 것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방송 바닥이 좁다고는 하지만 나와 민창이가 함께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낮은 편이다. 민창이가 촬영팀을 섭외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 몇 년 더 걸리고, 나는 늦깎이로 시작해 촬영일이 많은 편이 아니다. 서로 충분한 연차와 위치가 되어 직접 섭외한 것이 아닌, 각자의 인연으로 다른 길을 걷다가 같은 현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하필이면 내가 새로이 자리 잡은 분야가 방송이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촬영감독이 민창이 선배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고, 그 선배는 최근에 독립해 자신이 촬영팀을 섭외하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 팀이 섭외되고, 민창이는 그 사이 여러 프로그램을 돌며 그 선배를 알게 되고, 그렇게 우연한 인연들이 포개어져 10년 전 만난 나와 민창이가 방송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다는 것. 벅차오르기에 충분한 우연들이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나 보다. 이제 민창이와 나는 더 큰 미래를 꿈꾼다. 우리 손에 기획안을 들고 우리 프로그램을 따내기 위한 ‘100개 기획안’ 프로젝트라는 것을 시작했다. 시간을 쥐어짜 기어이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고 문서를 쌓는다. 언젠가 총괄 PD 김민창과 메인 촬영 감독 안창용으로 함께 하기 위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나는 우연을 믿는다. 우연이 그냥 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연은 방구석에서 생기지 않기 때문. 우연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대한다. 우연을 기다린다기보다 우연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 우연들은 결국 필연이 된다.

 

픽사의 시나리오 법칙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우연을 계기로 시작하는 사건은 좋다. 다만 사건이 우연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