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엄청 오래된 선풍기가 있다. 족히 30년은 넘었을 것이다. 삼성제품인데 로고가 요즘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된 옛날 삼성 로고가 찍혀있다. 요즘 20대만 해도 아마 예전 삼성의 로고를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집 거실엔 늘 이 선풍기가 있었고 그 장면들이 아직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우리집을 거쳐간 선풍기는 꽤 여러 대가 있었지만 대부분 몇 년 쓰다보면 목이 꺾이는 부분이나 머리가 돌아가는 부분의 어느 부위가 파손되서 덜렁덜렁해지거나 모터에 문제가 생겨서 그다지 오래 쓰지 못하고 분리수거장에 버려졌다. 고장 뿐만이 아니고 나날이 발전하는 신기술 덕분에 가전제품은 보통 10년 쯤 쓰고나면 새 것으로 바꾸게 된다. 오래된 브라운관 TV가 PDP를 거쳐서 LED TV로 바뀌었고 통돌이 세탁기는 드럼세탁기로 바뀌었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집안의 가전들은 수차례 바뀌어왔지만 유일무이하게 이 선풍기 한 대 만은 본가에 아직 남아있었다. 딱히 기술발전이랄게 없는 가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절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의 내구성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선풍기는 부모님 집에서 다른 선풍기들에게 밀려 최근 한동안은 사용되지 않고 창고에 보관 되어 있었다. 엄마가 버리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전부터 절대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 본가에 갔을 때 선풍기를 차에 실어서 가지고 돌아왔다. 밑바닥을 뜯어보려고 봤는데 검수표를 보니 무려 84년도 제품이다. 오래됐겠거니 짐작은 했었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인 줄은 몰랐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엄마가 20대였던 시절이고 아마도 우리 형이 걸음마를 할 때 쯤 부모님이 구입하셨던 것이다.

 

전원을 연결해서 작동시켜보니 잘 돌아가기는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던 회전기능이 이제는 선풍기가 너무 오래되서 그런지 고장이었다. 일단 드라이버를 가지고 풀 수 있는데 까지 풀어서 모터 주변의 37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닦았다. 낡을대로 낡은 플라스틱 부위 중에서 조금 약한 부분은 쉽게 바스러지기도 했다. 문과생의 저력을 보여주겠노라고 와이프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몇 시간을 드라이버 하나 들고 조였다 풀었다 했지만 결국 회전 기능은 살려내지 못했다. 더 손댔다간 아예 고장나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모터만큼은 고장나지 않고 잘 돌아가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일렉기타 중에서 펜더(Fender) 사(社)의 기타를 중심으로 레릭(relic)이라는 분야가 있다. 기타를 아주 오래 쓰다보면 바디와 핑거보드 쪽 자주 닿는 부분의 도장이 까지기도 하고 픽가드, 픽업커버, 볼륨-톤 노브 등 원래 하얀색이었을 플라스틱 파츠들이 점점 누렇게 변색된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연주된 기타의 그 낡은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이런 기타를 ‘레릭’ 이라고 부른다.

레릭처럼 보이려고 멀쩡한 기타를 일부러 도장을 벗겨내고 플라스틱 파츠를 담뱃불에 그을려서 변색시키는 등 오만 짓을 다해서 의도적으로 낡아보이게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펜더 기타 중에서도 장인이 공방에서 수작업으로 만드는 고가의 기타를 취급하는 펜더 커스텀샵에서는 새 기타를 후작업을 거쳐서 레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는데 이런 기타들은 아주 고가에 판매된다. 기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낡은 쓰레기같은 기타를 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사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장인이 작업한 레릭 기타는 실제로 아주 오래된 연주된 기타처럼 감쪽같긴 하지만 그건 인위적인 아름다움일 뿐 연주자의 손 때가 묻은 오래된 기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아니다. 진정한 레릭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서울전자음악단의 신윤철이 연주하는 펜더 기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메인으로 연주하는 기타는 아버지 신중현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반백년은 족히 넘었을 게다.

우리집 선풍기는 ‘레릭’과도 같다. 한 때 하얀색이었던 몸체는 누렇게 빛이 바랬고 페인트로 마감된 날개 커버 부분은 군데군데 도장이 까졌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아름답다. 작금의 레트로 열풍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다른 선풍기에 뒤지지 않게 바람도 여전히 시원하고 아직 쓸만하다는 것. 언젠가 모터가 고장이 나도 이건 골목에 영감님들이 운영하는 전파상이라도 찾아가서 고쳐 쓸 생각이다. 미친 척하고 삼성 디지털 프라자에 가져가볼까? 흔쾌히 AS를 받아 주면 대박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