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세계 어느 사막보다도 건조하고 황량하다. 바람의 결을 따라 한 꺼풀씩 벗겨지는 사구들이 길을 냈다 지우기를 반복할 뿐이다. 연평균 강우량이 3mm라고는 하지만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 모습이 마치 달이나 화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인데, 실제로 미항공우주국인 NASA는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주에서 쏠 원격 착륙 장치를 테스트한다. 가장 혹독한 시기에는 미생물조차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니 거의 죽은 땅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 기후 현상인 슈퍼 엘니뇨로 인해 아타카마 사막에 폭우가 내리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약 5년 주기로 발생하는 이 폭우는 거의 12시간 내내 쏟아져 사막의 깊은 땅속까지 적시는데, 그 양이 아타카마 사막의 7년 강우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폭우가 그치고 약 3주가 지나면 모래뿐이던 사막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개한다. 마치 죽은 줄 알았던 땅이 긴 잠을 깨고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만 같다. 이런 모습은 미국의 콜로라도, 아프리카의 나미비아 사막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딱히 사막이라고 할 곳은 없지만 여러 사정으로 버려지거나 폐쇄되어 죽은 취급을 받는 땅들은 곳곳에 있다. 과거 주한미군 기지에 딸려 있던 DRMO(군수품 재활용 유통사업소) 옛터도 그런 땅 중 하나다. DRMO 옛터는 오랜 세월 축적되고 방치된 폐기물에서 나온 다이옥신, 석면 등 독성 물질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반환받고 난 뒤로도 폐쇄된 땅으로 남겨져야 했다. 인천시 부평구의 DRMO 옛터는 현재 환경정화 작업이 단계별로 진행 중이며 일부 공간은 올해 10월부터 영구 개방될 예정이다. 전쟁의 황폐한 역사와 유독한 폐기물로 덮여 있던 땅이 녹음이 우거진 도심 속 숲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사막, DRMO 옛터와 같은 거창한 공간이 아니더라도 동네 곳곳에는 버려지거나 죽어버린 듯한 땅들이 꽤 많다. 지지부진한 재개발을 기다리는 판자촌이나 건설사가 부도나 짓다 만 건물이 방치되는 곳, 사유지라며 출입을 금지해두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이 살지 않아 흉가처럼 변해버린 곳이 모두 그렇다. 꽤 오랫동안 괴담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곤지암의 한 정신병원도 지난 5월 완전철거되었다. 도시계획도로와 맞닿아 있고, 인근 경전철 역과도 가까워서 주택단지로 개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떤 땅들은 그렇게 죽음을 닮은 긴 잠에 빠져있다가도 때가 되면 꽃밭으로, 우거진 숲으로, 사람 냄새나는 주택가로 생기를 발산한다.

4번의 올림픽

영국의 세단뛰기 육상 선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트랙 위를 세차게 뛰었다. 한국 나이로 당시 22세였던 그는 앳된 얼굴과 진한 갈색 머리에 상하의 흰색 유니폼을 입었다. 40m 가까운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 세 번을 날아오르고 모래판에 착지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기록을 예감한 듯, 입술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며 퇴장했다. 88서울올림픽에서 그의 최종 순위는 23위였다.

4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국 대표로 출전했다. 더 다부져진 체격과 빨라진 속도를 뽐내며 트랙을 달리고, 모래판 위로 몸을 던졌지만 성적은 더욱 저조했다. 이번에는 모래판에 착지하자마자 아예 머리를 감싸며 일어났고 자신의 기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종 순위는 35위.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6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총 2번의 올림픽, 8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무용해지는 듯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93년 제4회 슈투트가르트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 1995년 제5회 예테보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세단뛰기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올림픽 무관의 설움을 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3연속 영국 세단뛰기 대표 선수로 출전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 새치가 많은 편인지 벌써 옆머리가 희끗해진 그는 이번엔 착지하자마자 자신의 기록을 확인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4년 전, 8년 전보다 월등히 좋은 기록이었지만 아쉽게도 최종 순위는 은메달. 그래도 무려 3번의 올림픽, 12년의 세월을 포기하지 않은 보상으로는 꽤 빛나는 성과였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른을 넘기면서 육상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이미 지난 셈이고 이른 은퇴를 준비해도 마땅한 시기였지만, 그에게는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염원이 남아있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그는 조백발에 가까운 흰 머리로 마지막 세단뛰기에 도전했다. 하나, 둘, 셋.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주먹을 힘껏 쥐었다. 확신에 가득차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최종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4번째 올림픽 도전, 16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심지어 그가 금메달을 땄던 1995년 제5회 예테보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기록인 18.29m는 지금까지도 세단뛰기 남자 세계 신기록으로 남아있다. 메달권은커녕 열 손가락의 순위권에도 들지 못하던 선수가 세단뛰기의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황량한 땅의 긴 잠과 영국 세단뛰기 선수의 오랜 도전기. 둘의 공통점은 확실하다. 살아있다면,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때는 온다는 것. 죽은 듯이 잠들었다는 말은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고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은 여태 살아있었다는 말이다. 그 땅들은 한 번도 호흡을 멈추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16년간 계속 달렸다는 말은 아무리 괴로워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는 말이다. 소득 없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여겼던 그 시간 덕분에 삶의 목표와 가치가 보다 선명해지고 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결국엔 누구보다 탁월한 기록을 경신해낸다. 지금, 긴 잠과 오랜 실패로 지쳐 있다면 곧 때가 올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곧은 마음으로 당당히 걸어 나아갈 바로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