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에서 시작된 확진자가 전국 17개 시도에서 속출하고, 일부 교회들이 비대면예배를 거부하고 현장예배를 강행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어느 때보다 높다.

 

한동안 안정적으로 관리가 이뤄지면서 경제 상황도 조금씩 나아지고, 전 세계로부터 방역 모범 국가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던 가운데,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 되면서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었으니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태신앙인 나 조차 그렇다.

 

그래서,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인지, 현장예배를 고집하는 기독교인(이라 쓰고 개독교인이라 불리는)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 가르침이 맞냐 틀리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뭐라고 가르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 됐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Q&A 형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Q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나?

 

교회는 철저한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믿음과 불신 등 단어의 의미가 가지는 뜻 보다 훨씬 강하게 구분한다.

 

예를들어, 교회에서 기독교 신도들은 거룩한 무리라고 하여 ‘성도’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가 ‘구별된 존재’ 이므로 존재 자체가 비기독교인과 구분된다. 단순화하면 교회는 ‘선’이고, 교회 밖은 ‘악’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비기독교인은 ‘마귀의 자손’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의 결혼을 ‘죄’라고 가르치고, 심지어 비기독교인과는 친하게 지내거나 사업을 하는 것도 피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라는 성경 구절이 그 근거다.

 

교회 밖도 원래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탄이 다스리고 있다.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사탄을 물리쳐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교회 밖은 전쟁터이고, 기독교인들은 그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 과정을 ‘전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Q 한국 교회는 미국과 다른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나?

 

앞서 말한 ‘교회’와 ‘교회밖’이라는 구분이 국가에도 적용된다.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나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성경과 신앙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웠기에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우리나라도 선교사들과 미국 덕분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고,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어서 신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재건했기에 지금처럼 부유해졌다고 믿는다. 즉, 현실 세계에서 잘 사는 방법은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가장 이상적으로 꿈꾸는 것은 이스라엘의 다윗과 솔로몬 왕조다. 하나님이 세운 왕이 다스리는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개신교가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힘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비기독교 국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고, 혼란스럽다고 본다. 중동 국가는 이슬람 때문에 매일 테러와 전쟁에 시달리고, 동남아 불교 국가는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탄압하는 국가는 최악이다. 거의 사탄과 동급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공산 국가가 대표적이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Q 한국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고, 믿음이 있어야 천국을 가고,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믿음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 ‘행동’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성경 구절로 행동을 요구한다.

 

예배 참석, 헌금, 봉사, 전도, 선행, 심지어 사랑까지. 모든 것을 ‘믿음’과 결부 시킨다. 그래서 예배에 한번 빠지거나 헌금을 적게 하거나, 봉사에 참여하지 않거나.. 하여튼 뭐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치명적이다. 믿음이 부족하면 복을 못 받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는 성경 구절은 엄청난 압박감을 준다. 그렇기에 믿음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피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뭐든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한번 게으름을 피워서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천국에 못 가면 너무 억울하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믿음’은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 때문에 불이익이 생기더라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코로나 따위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된다. 죽을 병도 아닌데다, 예배 참석해서 코로나 걸려 죽으면 오히려 믿음을 증명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Q 교회에서 목사는 어떤 존재인가?

 

성경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크게 제사장과 선지자, 사도로 나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이 양, 염소 등의 제물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제단에 불살라 그 사람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면 그 사람의 죄는 없어진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라 불리기도 한다.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니 회개하라’,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가 주 메시지였다.

 

사도는 쉽게 말해 ‘예수님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흔히 아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거의 대부분과 바울 등이 있다. 신약 성경 대부분은 ‘사도’들의 기록이고 가르침이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는 앞서 말한 제사장, 선지자, 사도의 역할을 다 한다고 보면 된다. 담임 목사는 그 교회 신도들에게는 하나님과 예수님 다음이라고 봐도 좋다.

 

‘믿음’과 ‘행동’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목사를 대하는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즉,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목사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신도들은 목사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된다. 목사의 말에 의심을 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불신지옥’이다. 목사가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거 하지 않으면 ‘형제님, 하나님이 많이 안타까워 하실겁니다’라는 목사의 말에 잠 못들 수 있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는 종이라기 보다 교회의 ‘주인’에 가깝다.

 

교회 내부에도 의사결정 기구가 있다. 의사결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목사도 있지만 그건 좀 뻔뻔하거나 촌스럽다. 대신, 의사결정 기구에서 내린 방안에 대해 ‘그 부분은 좀 더 기도가 필요해 보입니다’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다른 결정을 유도할 수도 있다.

 

행정적으로 최종 권한을 갖는 목사의 의견을 거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부 신도들이 검사 결과를 믿지 않고, 광화문 집회 참석을 숨기면서 검사를 거부하는 것은 왜일까? 종합하면, 현재 이들은 지금 정부가 공산주의라고 생각한다. 믿지 못할 대상이고 물리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을 가진 자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 이 정부는 공산국가처럼 기독교를 탄압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가짜 확진자를 만들어 잡아 들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은 누가 준 것일까?

 

여러 교회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교회와 목사의 가르침이 변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