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무지 지켜준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 말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민망한 표현이었다. 재산이나 업적을 위해 붙이기에는 참을만했다. 그러나 사람에겐 도저히 쓸 수 없는 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지키려면 온종일 붙어 갑작스러운 사고나 강도에도 대처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잖은가? 붙어 있는다 치더라도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무기력함은 마찬가지다. 더구나 악당의 침략을 받아 암살 대상이 된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누군가를 내가 지킨다는 건 쓸데없는 오지랖으로만 느껴졌다. 과잉된 애정표현으로 다가왔다. 군 복무 시절 타의에 의해 국가를 지키겠다는 외침 이외에 나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지구 정도는 되어야 지킨다는 표현을 쓸만하지 않을까? 근데 그런 건 어벤저스나 되어야 할 법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곧잘 하는데 지켜준다는 말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지킨다는 말이야 말로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았으니까. 사실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지켜준다는 대사가 나올 때마다 의아했다. 외부적 위협 요인이 없는데 대체 무엇으로부터? 결혼 전 아내가 자신을 지켜주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러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고 곁에 있겠지만 지킨다는 말의 실체를 모르겠다고. 아내는 그냥 말이 그런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그런 말로 그러겠다고 하며 넘어갔다.

내가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건 아빠가 되면서부터다. 작고 여린 생명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지켜야 한다는 사명 같은 것이 온몸에 깃들었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요인이 위협처럼 느껴졌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의 모습은 숭고했고 한없는 무방비 상태처럼 보였다. 결혼 전 그냥 그런 말로 넘어갔던 약속이 실체로서 다가왔다. 지켜준다는 건 지구방위 수준의 대단한 업적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조그마한 아이와 내가 있음으로 가족의 삶을 꾸려나가는 어여쁜 아내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한 가지 내 생각이 맞았다면 지켜준다는 표현이 아무에게나 사용해선 안될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 삶의 목적이 변했듯 지켜준다는 건 나보다 너를 우선하겠다는 각오였다. 이제 나는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산다. 그들의 내가 사는 행성이고 내가 숨 쉬는 지구다. 시니컬함에 젖어 전에는 쓰지 않던 표현들이 지금의 내겐 가슴 한가운데 품고 사는 목적이 되었다. 목숨을 건다거나, 지켜준다거나, 인생을 바친다거나 하는 말들. 가족이 모여 세상이 되니 가족을 지키는 건 곧 지구를 지키는 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