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로 시작되는 가사와 멜로디는 아마도 지금의 10대부터 60, 70대까지 전 연령층이 알고 있을 겁니다. 1989년 발매된 신촌 블루스 2집에서 故 김현식이 부른 <골목길>은 이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꾸준히 다시 불렀습니다. 몇 개월 전에도 <보이스 코리아 2020> 1회의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참가자인 김예지가 불러 화제가 됐었죠.

한 달쯤 전부터 친구 J가 턴테이블과 LP에 관심을 갖더니 얼마 후 데논의 턴테이블과 이선희, 이문세, 심수봉, 조용필, 신촌 블루스 등 LP를 사들였습니다. 그 덕에 저도 명반을 오리지널 사운드로 들어볼 기회를 얻었는데, <골목길>이 수록된 신촌 블루스 2집은 정말 한 곡도 아쉽지 않더라고요. 전반적으로 끈적끈적하고 그루비한, 블루스 특유의 분위기가 깔려 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이 당기는 앨범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화끈한 가창과 스캣이 도드라지는 <골목길>은 튀는 축에 속했죠.

특히 <바람인가, 빗속에서>,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은 행여 LP가 닳을까 아껴 듣고 싶을 정도였어요. <바람인가, 빗속에서>는 ‘바람인가’와 ‘빗속에서’ 2곡을 1곡으로 편곡해 엄인호와 김현식이 함께 부른 곡입니다. 엄인호 특유의 걸걸한 보이스는 정석적인 발성법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삶의 풍파에 다져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큼직한 덩어리의 감정이 아니라 잘게 채썬 감정 사이사이에 회한과 체념을 양념으로 버무린 듯한 목소리랄까요. 짧은 가사에도 섬세하게 감정이 배어있어 노래의 어느 한 부분도 간이 싱겁지 않았습니다.

김현식의 목소리는 구구절절 말이 필요 없었어요. 과장을 보태지 않고, 만약 제게 평생 하나의 목소리로만 노래할 수 있는 선택권이 생긴다면 저는 김현식의 목소리를 택할 겁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신촌 블루스 2집 때의 김현식 목소리를 말이죠. 우리에서 벗어나려는 짐승의 포효와 벗어난 직후의 포효가 공존하는 목소리, 줄이 끊어진 번지점프처럼 직선적이면서도 파도를 타는 서퍼의 움직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리듬감을 품은 목소리, 임재범과 강산에와 김정원의 목소리를 섞어놓은 목소리입니다. (김정원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심각한 박치인데 목소리는 정말 멋지시거든요.)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은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보컬인 김종진이 작사와 작곡, 노래까지 맡은 곡입니다. 마치 조덕배의 <그대 내맘에>가 떠오르는 서정적인 전주는 듣자마자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죠. 특히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 그것을 사랑하는 내 님께’ 라는 가사는 전례 없는 방식의 사랑 가사입니다.

대중가요에서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가사는 많습니다. 보고 싶다, 다시 만나면 더 잘해줄 텐데,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다시 돌아와, 그런 가사는 차고 넘치죠. 그런데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당신께 보내겠다는 가사는 드물기도 드물거니와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또 하나의 나를 당신께 보내도, 지금 여기 있는 원래의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또 하나의 나를 당신께 보내는 건, 내가 아니라 오롯이 당신을 위한  것이죠. 나의 그리움이 아니라 당신의 외로움과 당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1989년의 사랑은 이토록 순수하고 이타적이었나봅니다.

물론 앨범의 다른 곡들도 모두 좋습니다. 신촌 블루스 2집을 들으면서 가장 놀랐던 건,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거나 엉성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사와 사운드, 목소리까지 모두 독보적으로 매력적이에요. 록과 블루스가 적절히 섞인 신촌 블루스 특유의 느낌은 촌스럽거나 세련되거나 하는 차원을 넘은 오리지널리티를 발산합니다.

신촌 블루스 이후 대중가요에서 블루스 장르가 주류를 이룬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이후 록, 발라드, 알앤비, 힙합이 순서대로 주류를 차지했고 심지어는 퓨전 국악이나 팝페라까지 종종 관심을 받았지만 블루스는 여전히 낯설죠. 가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올드 재즈나 블루스는 들을 수 있어도 한국 가수의 블루스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니 기다려보면 되는 걸까요? 신촌 블루스 멤버처럼 엄청난 가수들이 또 나타날 수 있을까요? 장르는 다르지만 혁오, 사뮈, 장기하, 잔나비 그런 가수들 정도라면 어쩌면,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한국형 블루스의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가수를 꼽자면 아마 최항석과 부기몬스터가 대표적이고 독보적일 겁니다. 2018년에 첫 앨범을 발매한 최항석과 부기몬스터는 신촌 블루스와 달리 록보다는 블루스와 재즈의 분위기가 다분하고, 유쾌하고 솔직한 가사가 돋보입니다. 요상하게 박자에 딱딱 들어맞는 나레이션(?!)이 특징적인데, 듣다 보면 웃음이 픽픽 새어 나오죠.

‘초콜릿 복근 몸짱, 난 그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운동할 바에는 난 그냥 뚱뚱하고 잠 많이 잘래요. 행복하냐구요? 네. 전 뚱뚱해서 많이 행복합니다.’라는 나레이션에 이어 ‘난 뚱뚱해/ 하지만 행복해/ 난 뚱뚱해/ 그래서 행복해’라는 후렴이 즐거운 <난 뚱뚱해>는 다이어트 중에 식단 조절 실패한 날 듣기 좋아요.

‘그렇게 너만 생각하다간 넌 망해/ 술만 맨날 퍼마시다간 넌 망해/ 밤새 도박만 하다가 넌 망해/ … 니 꿈만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망해/ 꿈 없이 그냥 살아가도 넌 망해/ 내 말 좀 들어요, 그러다가 나 망했어요’라며 훈계인 듯, 저주인 듯, 자책인 듯한 <망해>라는 노래도 좋습니다.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 이러다 망하는 건 아닌지 불안할 때 들으면 왠지 명쾌한 답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노래죠.

그 외에도 대부분의 노래 가사들은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고, 독설 같은데 희한하게 위로가 됩니다. 신촌 블루스의 멤버였던 엄인호와 함께 부른 <푸들푸들블루스>도 마음이 힘든 날 듣기 좋아요. ‘가슴 많이 아파도 위로받고 싶어도/ 너무 외로워 속상하기만 할 거야/ 털털하게 푸들 푸들/ 푸들 푸들 푸들 블루스’ 라는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그래 뭐 어쩌겠어.’ 하는 체념과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배짱이 동시에 차오르거든요.

1989년의 신촌 블루스와 2018년의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오늘 밤엔 거의 30년의 간격을 두고 듣는 한국형 블루스의 매력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요즘처럼 바람이 슬슬 차가워질 때, 거실과 부엌의 조명을 어둡게 하고서, 소주든 와인이든 술을 홀짝이면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