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록 거대하고 허무한 실패

국내외 브랜드를 막론하고 전기차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수입 전기차의 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와 카이즈유 데이터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올해 11월까지 판매된 수입 전기차는 1만4729대. 작년 같은 기간 판매량인 3749대에 비해 약 3.9배 증가했다. 가격, 정부의 지원, 편의성 외에도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캠페인 수준을 넘어 글로벌 이슈가 되면서 당위성까지 공고해지는 추세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런 와중에 뛰어난 연비와 성능, 매끈한 디자인을 갖추고도 상용화되지 못한 전기차도 있다. 바로 다이슨 사의 N256 모델이다. 다이슨이라고? 맞다. 무선청소기와 헤어드라이어로 유명한 바로 그 다이슨이다.

다이슨은 2016년 돌연 전기차 개발을 선언하는데, 불과 3년 만인 2019년에 프로토모델인 N256 모델을 선보였다. 무게 2.6톤, 전장 5미터에 달하는 7인승 대형 SUV인 N256 모델은 1회 충전으로 965km를 달릴 수 있으며, 제로백은 겨우 4.8초에 이른다. 게다가 다이슨의 공기 정화 기술 등 실내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여러 기술까지 탑재했다. 무려 5억 파운드(약 7200억원)을 들인 전기차였고, 개발 당시 2021년 상용화를 목표로 했던 전기차였다. 그런데 다이슨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은 2019년 10월 10일에 생산을 포기한다. 1대당 생산 비용이 무려 2억 2천만 원에 달해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3년의 개발 기간, 5억 파운드의 비용, 수십, 수백 명의 인력까지. 한순간에 허무한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거대하고 허무한 실패라고 착각할 뻔한 순간이었다.

  • 빛은 꺾일지언정 끊어지지 않는다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가 1971년에 발표한 『굴절적응(exaptation)』이라는 논문이 있다. 굴절적응이란 ‘하나의 유기체가 특정 용도에 적합한 특성을 발전시키고 이후에 그 특성이 전혀 다른 기능으로 이용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최초에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새의 깃털은 후에 하늘을 나는 용도로 바뀌었다. 원래는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기 위해 지폈던 횃불이지만, 비바람을 막아줄 동굴을 찾는다면 추위를 막기 위한 불씨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인터넷 플랫폼인 월드와이드웹(www.)도 굴절적응의 결과물이다. 원래 용도는 하이텍스트 포맷으로 연구 내용을 공유하는 플랫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쇼핑을 하고, 동영상과 웹툰을 보고, 심지어 각종 범죄의 온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종류와 역할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굴절적응이 일어난 것이다.

90년대 초까지 온 국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던 삐삐는 90년대 말 휴대폰 대중화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시대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 삐삐 산업의 대실패였고, 잔인하지만 당연한 순리였다. 그럼 그 시절의 삐삐 제조 업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삐삐의 후예(!?)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진동벨을 사용해본 적 있다면 말이다. 진동벨은 제작 원리가 간단하지만 배터리나 주파수 간섭 등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한 분야이다. 통신장비를 다루던 기존의 삐삐 제조 업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낙담하지 않고 진동벨 시장에 뛰어들었다. 현재 한국 진동벨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한 리텍 사 역시 원래는 삐삐 제조업체였다. 이 또한 굴절적응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굴절적응’의 비유를 빛에 적용해보자. 빛은 다른 매질을 통과하면서 특정 각도로 굴절된다. 굴절된 방향은 원래 빛이 향하던 방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빛은 여전히 나아간다. 그 사실이 중요하다. 빛은 꺾일지언정 끊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  실패를 내버리지 말자

다시 다이슨의 전기차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이슨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겨우 실패를 얻은 걸까. 다이슨의 전기차는 한때의 영광, 끝내 잊힐 역사일 뿐일까. 제임스 다이슨은 전기차 상업화 포기 이후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기차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전기차의 문제점을 최첨단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엔지니어와 과학자, 디자이너들이 함께 훌륭한 공학적 성과를 이뤄냈고 이를 다이슨의 다양한 연구개발 분야에도 빠르게 적용할 수 있었기에 이번 도전을 후회하지 않는다.”

에이, 그래도 너무 심한 자기합리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이런 소식을 접했다. 전기차 개발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퍼포먼스가 뛰어난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단서들을 발견했다고. 전기차 상용화 실패에 낙담하지 않고, 업그레이드된 배터리를 상용화하기 위한 연구에 엔지니어들이 전격 투입되었다고. 원래는 전기차를 개발하려던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더 나은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거대한 실패 이후 다이슨이 이토록 침착하고 담대하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건, 실패를 그저 실패로 여기며 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도전했기 때문이고, 원래의 목적과 의도에만 사로잡혀 굴절적응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무수한 도전들도 마찬가지다. 도전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도전은 뜻밖의 새로운 도전을 맞닥뜨리고 우리는 도전들을 통과하면서 예상치 못한 각도로 굴절된다. 그런 굴절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의미를 건져내기 위해 노력할 때 실패는 성공의 실마리가, 위기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꺾이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