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 싶을 때 본다

아주 어릴 적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저희 집에는 금성, 그러니까 Goldstar의 TV가 있었습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 변경과 음량 조절을 하던 TV였는데, 여름 장마철이나 가을 태풍철에 전파 수신이 불안정해지면 종종 화면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옥상에 올라가 안테나를 손보곤 했죠. 너무 옛날이야기인가요?

그러다 대우, LG, 삼성의 TV가 나올 때쯤 유선 방송을 편히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채널이 적어서 인기 드라마 시청률이 40%, 50%씩 나오기도 했더랬죠. 조금 더 지나자 채널 수가 늘었고, 셋톱 박스를 설치하면 케이블 채널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 중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스포츠, 종교 채널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죠. 한때는 집 베란다나 지붕에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원형 안테나 하나 있으면 꽤 그럴듯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TV 자체적으로 녹화, 예약, 일시정지 등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요.

요즘은 어떤가요? 케이블 방송도 곧잘 보긴 합니다만,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주로 OTT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넷플릭스나 왓챠, 뭐 그런 거요. 안테나로 전파 잡거나 케이블 선 연결하던 시절과 달리,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OTT 서비스가 대중적입니다. 자체 제작 콘텐츠의 질과 양이 독보적일뿐더러, 재방송도 편하게 찾아볼 수 있고, 장르도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OTT 서비스가 과거와 구분되는 지점은 방송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예전엔 드라마 할 시간, 예능 할 시간 맞춰서 TV 앞에 앉아 있었는데 이젠 내가 원하는 시간, 가능한 시간에 언제든 OTT 서비스로 콘텐츠를 즐긴다는 거죠. 볼 수 있을 때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을 때 본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이런 변화가 라이프스타일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삶의 주체성이 더 확고해졌달까요.

  • 누군가에겐 순풍, 누군가에겐 역풍

OTT 서비스는 시대의 순풍을 맞아 돛을 펼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PC가 대중화되고 인터넷이 보급된 거야 수십 년 전 이야기지만, 최근 들어 사물인터넷의 급진적인 발전, 영상제작의 디지털화, 스마트폰으로 인한 1인 1미디어 소유 등 여러 요인이 마치 OTT 서비스의 성공을 응원하듯 궤를 함께 해왔습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집콕’이 신종 생활 양식이 되면서 성장세가 더 두드러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세상의 변화가 늘 비즈니스에서의 순풍일 수만은 없겠죠. 사실 역풍일 때가 훨씬 많을 겁니다. 비즈니스에는 나름의 계획이라는 게 있는데, 세상의 변화는 계획 따위 없거든요. 2020년을 통째로 관통하고 있는 코로나19는 그야말로 그냥 들이닥친 변화이고 역풍입니다. 수많은 비즈니스가 꺾이고 부서지고 쓰러졌습니다. 자영업자들은 함께 힘든 처지에 업종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서로를 헐뜯기 바빠졌고요. 스포츠 업계도 휑한 관중석을 맞이해야 했죠. 멀쩡하던 사람들도 코로나 블루를 겪는 한 해였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 와중에 호황을 누리는 비즈니스도 있습니다. 매장에서 갖는 외식이 줄어들면서 택배나 배달 비율이 확연히 높아졌습니다. 마스크, 손소독제를 비롯한 청결 위생용품이 불티나게 팔렸고 2011년에 출시한 온라인 화상 회의 플랫폼인 ZOOM 또한 전례 없는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역풍이 다른 누군가에겐 복권 당첨만큼 든든한 순풍이 되는 현실. 당연하지만 그래서 더 잔인하고, 잔인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 역풍이 불수록 더 찬찬히

외신도 주목하는 한국의 대학생이 한 명 있습니다. 계원예술대학교의 김하늘 씨는 버려진 마스크를 재활용해 가구를 만듭니다. 아직은 상업화 단계 이전이고 우선은 의자만 만들고 있지만 다양한 가구를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약 1,500개의 마스크를 300℃ 이상의 고열로 녹이면 의자 1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이라 재활용이 가능한 마스크가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의아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직접 마스크 수거함을 설치하고 공장에서 불량 마스크를 얻어와 작업 중인 그에게 코로나19는 순풍처럼 보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순풍은 아니었을 겁니다. 전문 작가든 회사원이든 코로나19 여파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테니까요.

역풍이 불 땐 등을 돌리면 순풍이 됩니다. 물론 그걸 알아도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여건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원래 가려던 목적지가 있을 테니까요. 그 목적지는 단순한 계획을 넘어 나름의 신념이나 인생의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항로를 변경하는 건 꽤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심지어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우리에겐 가려던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역풍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빠른 길을 따라 항해하던 우리가 역풍을 만났을 때, 무작정 맞서 부딪히는 건 미련하고 냉큼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아쉽습니다. 그러니 길을 에둘러 가야 합니다. 닻의 방향을 조금씩 기울이면서, 해류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슬쩍 비켜서서 기회를 엿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김하늘 씨처럼 작가로서의 소명은 실현하면서 동시에 코로나19라는 역풍 속에서 마스크를 재활용하는 기회를 포착하는 겁니다.

순풍이든 역풍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역풍에 꺾이기도 하지만 순풍에 무작정 나아가다 길을 잃기도 하는 법입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차차 개발되고 보급되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2021년 연말이나 되어야 코로나19 여파가 잠잠해질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코로나19 이전과는 같은 세상은 아니겠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변화 속에 있습니다. 이 역풍에 비켜서서 찬찬히 닻의 방향을 기울이면서 각자의 항로를 개척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