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반의어는?
친구는 늘 고민을 가져와서 얘기했다. 고민은 매번 달랐지만 고민을 푸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친구는 어느정도 자기의 정답을 갖고 있었고, 내 의견이 궁금했다기 보다는 나에게 자신의 정답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어딘가 얘기해서 풀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한 구석 쯤은 아프기 때문일까. 아픈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지난 몇 년 간, 위로를 건네는 책들이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개인의 고민과 문제를 따뜻하고 감성적인 말로 위로하는 것이 대단한 열풍이었다. 그런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는 모습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책을 인용해서 위로하는 건 거의 시대적 덕담이었다.
그런데 언제쯤부터일까, 위로가 ‘약발’이 다 된것은. 위로가 값싼 처방으로 취급되고 대표적인 ‘위로 서적’은 ‘희대의 망언’이 되어버렸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혹은 위로는 커다란 착각이었을까?
 
어쩌면 폴 몰로니의 대답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몰로니는 정신의학자, 심리치료사, 카운슬러와 같은 주류 심리치료계를 도발적으로 비판한다. 몰로니는 심리적 고통의 문제가 개인의 부조리한 정신구조에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인을 위로하고 응원해서 생각을 바꾸면 심리적 불안과 우울,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기존의 접근방식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개인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는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걸 얘기하지 않고서 개인의 문제나 고통을 얘기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어쩌면 위로 서적들이 독자들의 씁쓸한 반응을 얻게 된 건 개인의 문제를 건드릴 때 내면만 건드리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공감하는 능력>의 저자인 철학자 로먼 크르즈나릭도 같은 입장이다. 지난 세기가 심리학의 시대였지만, 그 많은 심리치료가 사람들의 우울증을 생각만큼 줄이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과 담쌓은 채 자기 안에서 심리적 문제를 마주하고서 풀도록 도와주는 방식은 효과가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탐구함으로써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알아”내는 외성(外省, Outrospeciton)의 방법이 필요하고 말한다. ‘나’를 통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보는 방식의 시대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군대를 떠올려보니 폴 몰로니와 크르즈나릭의 어려운 얘기도 수긍이 간다. 군대는 다른 게(?) 힘들어서 그렇지 우울할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24시간을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선임, 후임, 동기, 생활관 동료들과 끊이지 않는 교류를 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틈이 없다. 늘 왁자지껄 공동생활을 해서 피곤할 수는 있어도, 외롭거나 우울하기는 힘든 생활 환경이다.
 
미군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20%는 헤로인 중독이었다. 미국 시민들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국하면 온 도시가 약물중독자로 쑥대밭이 될 거라고 크게 염려했다. 염려와는 달리 그들이 귀국하고나서 실상은 큰 문제가 없었다. 헤로인 복용자의 95%는 헤로인을 끊었고, 소수만이 재활시설에 갔을 뿐이다. 요한 하리(Johann Hari)는 미군들이 귀국해서 약물 중독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은 귀국해서 안정적인 자신들의 관계 속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 헤로인 중독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다.
 
‘마약 중독이 알려져있는 것처럼 화학적 작용 탓이 아니라면?’
‘사실 중독은 사람들과의 관계, 유대가 없어서 발생한거라면?’
 
요한 하리는 이런 질문을 집요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놀라운 답을 내놓는다.

“중독의 반의어는 ‘관계’다(The opposite of addiction is connection)”

위로 서적들이 개인의 문제를 내면 안에서만 스스로 풀어가도록 말을 건넸던 게 한계가 아니었을까? 요한 하리가 말하듯 외부와의 관계를 더 주목했더라면 어땠을까?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스스로 심리적 치유자가 되는 것 보다는 친구와의 대화나 유대감, 고민을 얘기해도 편견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정서적 지지망에 대한 얘기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친구가 또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요한 하리의 이야기를 소개해주고 싶다.
우리 각자의 문제를 바깥 세상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도 풀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문제는 ‘안’에 있을지 모르지만 정답은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