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도, 딱히 즐겨보는 예능 프로도 없다. 그런데 10년 전 쯤 어느 예능 프로에 출연한 연예인과 그의 한 마디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있다.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4년의 연습생 과정을 거친 뒤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무르익을 때 쯤 돌연히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커리어 전환을 이뤄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행보를 보였던 그는 비였다. 그 예능 프로에서 비는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가혹할만큼 치열하게 사냐는 질문에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자신보다 연기 잘하고, 잘 생긴 배우는 계속 나올 것이고, 그래서 새로운 입지를 조금씩 넓혀야 대체되지 않을거라는 강박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남과 다른 게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게 10년 전의 이야기다. 그랬던 비는 결혼을 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 1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내 귓등을 때리는 이유는 이렇다. 그가 보여준 처절함 때문이다. 당시 27살의 비는 세계 무대로 진출한 것에 걸맞는 ‘당당함’, ‘자신감’도 보여줬지만, 그가 일상을 대하는 태도는 ‘처절함’과 ‘절박함’이었기 때문이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 싫어서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삶의 최전선에 서겠다는 결의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연예계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비의 최전선과 맞닿은 곳이 또 있다. 글 쓰는 사람들도 최전선에 섰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는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박완서가 김훈의 글을 따라 쓸 수 없고, 김훈이 박완서의 글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 자기 색깔을 더 선명히 내고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고 얘기한다. 남들이 할 수 있는 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곧 대체불가능성의 출발점이다.

탁월한 문장력과 풍부한 어휘력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많다. 감각이 섬세한 사람, 학식이 높은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지, 은유 작가는 말한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당신이 글을 써야 한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하자고. 어떤 누구도 같은 삶을 살지 않고, 같은 삶의 조건을 갖지 않으며, 같은 생각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고. 결국 자기 삶의 최전선에 설 때에라야만 거기서 직면한 글이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출판 업계가 아주 어렵다고 한다. 요즘 안 어려운 업계가 어딨겠냐마는 출판업계가 정말 많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글 쓰는 사람들은 많이 늘었다.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아예 저자로 나서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글쓰는 사람이 늘어난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나만의 가설이 있다.

자기 삶의 ‘최전선’으로 가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그것이다.

글쓰기라는 건 직업인, 회사원, 사회인으로만 살면서 자기 목소리로 살아가는 방법을 점차 잊어가던 사람들이 문득, ‘이게 아닌데’하면서 시작하는 조심스러운 일상의 탈출구가 아닐까. ‘지영엄마’, ‘김대리’, ‘박부장’으로만 불리던 이들이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온전히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 발버둥이 글쓰기를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나를 찾고싶다’는 아주 간절한 삶의 표현이 결국 글쓰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비가 절박하고 처절하게 마주했던 일상처럼.

비가 “나는 대체불가능성을 추구한다”고 할 때와 “여러분도 대체불가능성을 추구해보세요”라고 할 때의 어감은 분명하게 다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위로가 폭력이 되어 청년들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던 것처럼. 사회인으로 존재하기도 벅찬데 뭘 더 노력하라고? 어떻게 더 대체가능한 ‘인재’가 되라고?

맞다. 가혹하다. 사회에서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려는 것은 최전선에 떨어지는 포탄을 감수하며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길만큼 가혹하다.  다만, 존재로서의 대체불가능성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글을 쓰는 사람도, 연예인으로 남들 앞에 서는 사람도 자기 삶의 최전선에서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게 뭘까’, ‘나는 왜 나일까’,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질문을 용기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 그 질문 앞에 선 사람들은 “내가 나라서 다행이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0년 전, 티비에서 보았던 비의 눈은 결연했지만 자신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