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을 때,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숨이 답답해져 올 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 말이죠. 빽빽하게 채우던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요? 아마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을 넘어 다시 힘을 내겠지요. 크게 소리를 질러보거나, 아예 잠깐 내려놓고 잊으려고 해보거나, 아니면 무작정 돌파하려고 한다거나. 저는 그럴 때 우선 걷는 걸 멈추고 털썩 주저앉아 답답한 일을 곱씹는 타입입니다.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지만, 문제를 마주하고 머리를 쥐어뜯다보면 어느 순간엔 도리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바로 그런 때, 상황이 마음 같지 않고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면 ‘아ㅡ 시원한 매실 물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릴 때 크게 위를 앓은 뒤로는 소화능력이 부족해진 탓인지 조금만 많이 먹거나 육류를 먹으면 금방 체하는 체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열손가락 매일 바늘로 딴 흔적이 마를 날이 없었을 정도였죠. 그런 주제에 또 음식 욕심은 많아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금세 탈이 나는 바람에 늘 어머니를 걱정 시켜 드렸죠. 매일 저녁 자장가처럼 제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저에게 웬 달큰한 물을 주셨습니다. 아는 사람 집에서 만든 매실 액기스라고 하셨습니다. 매실을 먹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시원한 맛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그냥 맛있는 주스 같은데 신기하게도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제 몸에 매실원액이 아주 잘 맞았던 것인지 조금 체기가 있다 싶을 때 한잔씩 마셔두면 답답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엔 언제나 커다란 2리터 생수통에 매실원액이 담겨있었고, 아무리 마셔도 같은 자리에 매실액이 있다는 사실이 제겐 부모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처럼 따뜻한 풍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풍경은 대학생 때까지도 이어졌지만 본가에서 멀어지고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차츰 매실액 대신 편의점에서 파는 소화제를 먹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소화제는 음식을 내려 보내주긴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지도 시원하지도 맛있지도 않네요. 골머리를 앓는 문제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듯 답답합니다. 정신이 육신을 지배한다는 말이 맞는지 심리적으로 답답할 땐 특별히 뭘 먹지 않아도 체하는 기분이 들곤 하죠. 이럴 땐 역시 시원한 매실 탄 물인데 말이에요. 매실 원액을 조심조심 따르고 물을 조금 붓고 얼음을 동동 띄우는 거예요. 이제 벌컥벌컥 한 잔 들이켜고, 호흡을 고르고, 멈춰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다시 으쌰으쌰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건 역시, 상쾌하고 멋진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