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꼰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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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해진 그 말, 꼰대.

십 년이 좀 더 넘은 그 언젠가. TV에서 한 연예인이 이성을 꼬신다는 것을 ‘작업하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삽시간에 퍼졌다. 광고에도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우리 삶 곳곳에도 스며들어와 어느샌가 우리는 ‘작업’ 이란 단어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말이나 단어가 급속하게 퍼져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 그것은 시대의 조류를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꼰대’ 란 말도 그와 다름 아니다. 내 기억에 ‘꼰대’ 는 그저 집안의 어른, 특히 무엇을 못하게 하거나 앞뒤가 꽉 막힌 ‘아버지’의 상장이었다. 즉, 그 의미는 국소적이었다. 하지만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그 말이 흔해져 버릴 대로 흔해졌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한 집안의 아버지에서 직장 상사, 어른 전체나 나와 뜻이 맞지 않거나 일방적인 지시를 하는 윗사람 전체를 상징하는 무엇이 되었다. 바야흐로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할 말은 하는 젊은이들의 성향을, 말은 못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그 조류를 가속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성장의 시대를 맛 본, ‘왕년’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현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는 말에 베인 간극도 혁혁히 한몫을 할 것이다. 아니면, 꼰대 자체가 많아진 것이거나 꼰대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나.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스스로를 꼰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분명히 꼰대는 존재한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보자. 당장에 떠오르는 말 안 통하는 상사가 떠오르는가. 일방적으로 일을 시키는 선배가 떠오르는가. 우리의 시선은 위를 향하고 있다. 즉, 우리는 꼰대를 ‘양산’하고 있다. 우리네에겐 그게 자연스럽다. 반대로, 아래를 바라보자. 난 후배에게 또는 부하 직원들에게 꼰대는 아닐까. 혹시 내가 지난 한 주, 한 달 동안에 ‘왕년에’ 라고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충고라는 미명 하에 나의 경험을 ‘강요’하진 않았는지. 후배와 부하 사원들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귀담아 들었는지. 이렇게 우리는 꼰대를 양산하고, 꼰대로 양산된다.
직장에서 꼰대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물론, 부정적 측면에서 하는 이야기다. 건강으로 치면 동맥경화와 같을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막는다. 또, 건전한 소통을 막음으로써 조직을 병들게 한다. 병의 실체가 그렇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발병할 수 있다. 참, 무섭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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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의 유형

꼰대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왕년’이라는 총알을 장전하고 ‘직위나 위치’라는 무기를 후배들에게 정조준하여 사정없이 쏘아댄다. 또는 원하는 답을 들을 떄까지 괴롭힌다. 귀는 있지만 듣지 않고, 눈은 있지만 보지 않고, 머리는 있지만 굴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처법이란 있을 수가 없다. 맞춰준다고 한들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다 맞춰주다가는 나 스스로가 거덜 난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개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라고. 그 적정선을 넘으면  꼰대라는 자격증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색다른 유형이 존재하지만, 모두 이러한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건 수많은 꼰대의 유형을 수렴한다.

그런데, 배울만한 꼰대도 분명 있다.
아니, 꼰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우리가 역꼰대일지도.

그런데, 옛말에 어른들 말 하나 틀린 것 없다고. 가끔은 분명 ‘꼰대’들의 말이 맞는 경우가 분명 있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좀 더 자주 있을지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등의 그 옛날 명언들도 희화화 되는 마당에 꼰대의 말을 곧이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자세가 되어 있을까? 사실, 우리가 꼰대라고 손사레 치던 그 사람은 꼰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정한 충고일 수도 있고, 정말 왕년에 그 사람이 겪은 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지도 모른다. 무책임하게 내뱉는 충고도 문제지만, 진심으로 내뱉는 충고를 무책임하게 튕겨내는 것도 문제다. 마음에 그럴 여유가 없거나, 그릇이 안되는 우리가 어쩌면 상대를 ‘꼰대’로 규정하는 ‘역꼰대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힘겹게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사업을 키워야 했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속도를 내어 무엇을 키워야 한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분주했다. 하지만 상사의 코멘트는 내가 하는 것과 매우 달랐다. 이것저것 벌이지 말고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 빨리 키우라면서 그리고 실무는 고려하지 않는 듯한 언행에 난 이미 그 상사를 ‘꼰대’로 규정했다. 방향은 누구나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속도와 규모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내게, ‘천천히 빨리’하는 아이러니한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마음과 귀를 닫았다. 물론, 내가 하는 방향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일단 벌여야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나는 그 모든 걸 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원은 한정적이고 ‘선택과 집중’ 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내가 ‘역꼰대질’을 하지 않고 듣기 싫어도 그것을 귀담아 들었다면 좀 더 빨리 그것에 대한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배움이란, 스승이 있어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마음을 열어 깨달을 수도 있다. 깨닫다는 어원은 ‘깨고’, ‘안다’라는 것에서 온다. 내 마음속에 있는 단단한 방어막을 걷어내면 깨달을 수 있단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꼰대들이 내뱉는 무책임한 충고 아닌 충고 속에 어쩌면 어쩌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수 없이 녹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꼰대들은 자신이 그런 것을 내뱉고 있다는 걸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랴. 내가 깨달아 알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내버리면 된다. 버려야 할 것이 전부라도 괜찮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것도 배움이다. 꼰대라고 규정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은 ‘역꼰대질’로 듣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못 얻고,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잃어왔는지 모르니까. 세상은 참 배울 것 천지다. 그러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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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와 신사, 그리고 직장인

1983년 리처드 기어 주연의 ‘사관과 신사’. 그저 그렇게 자라 온 주인공이 사관에 도전하며 신사, 즉 ‘사람’이 되어간다는 내용의 영화. 우리 직장인들은 어쩌면 회사에서 ‘신사’만을 만나길 기대하는지 모른다. 상대방이 ‘신사’이길 바라고 바랄 것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는 ‘신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사관 생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꼰대 생도’일 가능성이 높다. 신사로 해탈한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몇 되지 않는 신사들마저 우리는 ‘꼰대’로 규정할는지 모른다. ‘역꼰대질’이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 주위에 꼰대가 있음을 불쾌해하지 말자. 스스로가 신사가 아닌 꼰대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역꼰대질’을 지양하고 생도의 길을 가며 ‘깨고 알아’가보자. 때로는 꼰대(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고,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진심의 충고를 후배들에게 해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자.
내가 꼰대라고 규정한 사람들이 정말 꼰대인지.
내가 역꼰대질을 한 것은 아닌지.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