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물을 끓이는 것이다.
아직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걸어가 포트에 물을 올린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음이 가는 예쁜 컵을 꺼낸다. 그리고 물이 끓는 시간동안 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오늘 아침엔 뭘 마실까?’
찬장엔 캐모마일, 로즈마리, 루이보스, 페퍼민트 같은 허브티 종류부터 홍차, 커피, 녹차, 민들레차, 국화차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마실 것이 준비되어 있다. 차라면 가리는 것 없이 좋아해서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게 모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맛을 알고 즐기는 차도 있지만 차이를 잘 모르면서도 차가 좋아서 그냥 마시는 차도 있다. 차를 마시는 시간 자체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마실지 정해지면 티백이나 찻잎을 담는다. 오늘은 민들레차다. 다 끓은 물을 컵에 따른다. 이때 물이 찻잔으로 떨어지는 부드럽고 맑은 소리가 참 좋다. 하얀 김이 더운 향기가 되어 얼굴로 퍼져오면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컵을 들고 햇빛이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책을 꺼낸다.
고백하건데, 원래 이 타이밍에서 항상 휴대폰을 꺼냈었다. 그러다 어느날, 양심적으로 하루의 시작만큼은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서 의식적으로 독서를 하게되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무척 어울리고 만족스러운 시간으로 자리잡았다. 여느 결심처럼 작심삼일이 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이어져 온 건 아마 차의 힘이 아닐까 싶다.
뜨거운 차를 천천히 표면부터 식혀 한모금씩 넘기고 있으면, 시간을 잘게 쪼개어 늘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쉽게도 슥슥 지나가던 시간이 차를 마시는 동안 한 템포 한 템포 느리고 생생해진다. ‘차 한잔의 여유’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게 아닌 것 같다. 다만 이건 차를 마실 수 있는 사치로운 여유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일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준다는 의미인 듯하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컵의 따뜻한 온도, 가슴을 덥히는 꽉찬 온기, 차가 넘어가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청명함, 숨 속에 담기는 향기. 차를 마시는 시간이 주는 모든 것들이, 말하자면 ‘운치’일 것이다. 목이 탈 때 벌컥벌컥 넘기는 오렌지 쥬스도 매력적이지만, 부러 호로록 식혀가며 먹어야 하는 뜨거운 차도 이만큼 매력이 있다.
잘 우린 녹차에는 담소가 어울리고, 말린 꽃이 피어나는 찻잔에는 서정시가 어울린다. 나는 오늘 민들레차를 탔다. 민들레차는 칼로리도 없고 설탕에 재는 것도 아닌데 달콤한 맛이 난다. 그 달고 고소한 끝맛이 오늘 읽은 책에 잘 어울린다. 여기까지 과정을 세심하게 따라온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나는 아직 세수를 하지 않았다. 꼬질한 모습이라 운치가 반감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차의 매력은 그대로 전해졌길 기대하며, 이제는 씻으러 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