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때,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왼쪽 남자의 돌출된 입과 쭈글쭈글한 손등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칙칙하고 무거운 느낌에 인상부터 일그러졌고 거친 질감 또한 곧장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싶을만큼 찝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첫인상이 주는 느낌을 잠시 뒤로 한채,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눈빛,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과 찻잔에 물을 붓는 노파, 뒷모습만 보이는 소녀 위의 작은 불빛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리고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다시 보았을 때, 천장에 매달린 불빛이 은은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한 가정의 모습이 방금 전의 내가 느꼈던 쩐내를 말끔히 씻어냈다.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은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친구이자 동시대 화가였던 라파르트 또한 이 지저분한 느낌의 그림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자신의 친구의 이런 비평에 대해, 그리고 나같은 미래의 감상자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라파르트가 이 그림을 보고 왜 그렇게 지저분한 빛깔을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더 어둡고 지저분한 빛깔로 그릴 것이다. 그 탁한 빛깔 속에도 얼마나 밝은 빛이 있는 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그림에 진실을 담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는 이들의 삶의 진실을 담아낼 것이다. 사람들의 주름에 배어있는 깊은 삶과 손과 옷에 묻은 흙의 의미를 노래할 것이다.”

위의 그림은 빛의 화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이라는 작품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영롱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의 고흐 그림과는 달리 꽤나 투박하고 거칠다. ‘자화상’ 이나 ‘별이 빛나는 밤’ 과 같은 작품에 빗대면 어색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고흐의 습작기, 초기시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고흐의 가장 젊었던 시절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주로 애용하는 주식들 중에 유독 ‘감자’라는 식물만큼 투박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재료도 없을 것이다. 그 모양이 돌덩이 같이 못생긴데다가 뭔가 척박한 땅에서 수확한 서민들의 주식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고흐는 아마 이런 감자의 인상을 이용해,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 한 가정을 그려냈을지도 모른다.

감자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 고산지대를 원산지라 추정한다. 남미 원주민들의 유일한 식량이었던 때가 있었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구황작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던 때가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와 외모 덕분에 감자라는 말을 들으면 ‘꼬르륵’ 소리부터 들린다. 농부들이 허리를 펼때 내는 힘겨움의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심지어 뙤약볕 아래 농부들이 흘리는 땀 흘러가는 소리까지 들린다. 참 짠내나는 식품인데 거기에다가 소금으로 간까지 하니 더더욱 짠해지는 음식이다.

감자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많은 작물들 중에서도 감자는 제법 키우기 쉬운 편에 속한다. 환경의 영향을 그나마 적게 받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우기 쉬운 작물이라고해서 농부의 수고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단 하나의 감자지만, 그들은 이 하나의 작물을 수확하고 먹기 위해 온 세월과 정성을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감자를 통해 그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소리를 같이 먹고 있다. 그래서 고흐는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이 그림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말하려 했다. 노동이라는 신이 주신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한 줄기 불빛의 희망을 보고 그것을 나누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노동의 가치이자 삶의 진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현대인의 노동은 저 그림에 등장하는 감자만큼이나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을까 곱씹어본다. 지금 고흐가 현대사회의 노동을 그린다면 효율성과 효용성이라는 가치로 범벅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뿌려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노동자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들의 인권이 무시된 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매몰된 노동의 원래 가치를 신랄하게 풍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흐가 태어나기 몇 해전 1845년 아일랜드에서는 효율성이라는 이름하에 감자재배만 고집하다가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아일랜드는 감자재배가 쉽다는 이유만으로 대체작물은 심지 않고 감자만 재배했다. 그러다 남미로부터 건너온 감자마름병이 아일랜드 전국토를 휩쓸었다. 감자 이외에 대체작물이 없었던 당시 아일랜드는 기근에 허덕였고 곧이어 아일랜드는 무너졌다. 노동의 기계적 효율성이 나은 최악의 참사였다.

노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각 개인의 노동을 단 하나의 가치로 묶으려 할 때 자연은 이런 참혹한 메시지를 인간세상에 띄운다. 고흐가 이러한 자연의 메시지를 담아 노동의 진정한 가치와 신성함을 말하려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흐는 감자를 키우고 그것을 먹는 한 농부의 가정을 통해 노동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려 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깨끗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지만 감자를 키우는 농부에게 감자 특유의 흙냄새가 나게 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산업화 시대에 태어났다면 엔지니어들에게는 기름냄새를, 현대사회에 태어났다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 냄새가 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동의 냄새와 질감 뒤에 감추어진 사람들 간의 나눔을 강조했을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경쟁의 가치가 아닌, 저 그림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먹을 것을 건네주는 손처럼 노동을 통한 나눔의 가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고흐의 감자를 통해 노동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가 직업이라는 밭에서 캐내야 할 것은 소고기가 아니라 겨우 저 감자 한두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캐낸 각자의 감자 한두알 겨우 나누어 먹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장식하는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

 

 

두엄터로

마늘밭으로

햇빛은 온몸에 쇠똥칠을 하고 오는데

따뜻한 마구간 뜰팡에 앉아

어머니는 감자눈*을 뜬다

바람 부는 들판에서

사람들은 감자꽃처럼 피었다 지고

구들장 같은 어둠속에서

눈을 키운 감자들아

샛바람 차고 길은 멀어도

흙 속에 몸을 묻어

다시 꽃이 되고

뜨거운 밥이 되라고

어머니는 너의 피로 손을 적신다

– 감자눈을 뜨며, 이상국

* 감자눈 : 감자표면에 움푹 들어간 부분. 여기서 싹이 난다. 감자는 씨감자를 심어 재배하는데, 감자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싹이 날 부분(감자눈)을 도려 그 부분을 심으면 다시 감자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