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히 몸 챙기는 유난쟁이도 오직 제 입에 넣겠다고 소 뼈 고아 낼 작정을 쉬이 하진 못한다. 사골이든 꼬리뼈든 적어도 열 시간은 우려내야 뽀얀 국물 제대로 우러난다는데, 그 동안 불 앞 내내 지키진 않겠지만 신경 계속 두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냄비에 달랑 뼈 몇 조각 넣어 끓이는 건 수지가 안 맞는다. 한 번 할 때, 커다란 들통 가득 채울 만큼 대차게 일 벌인다. 반드시 먹일 사람이 있을 때나 엄두 낼 수고다. 소 뼈 곰탕은 그래서 자필로 꾹꾹 눌러쓴 헌정문 같은 음식이다. 우려내는 동안 먹을 사람이 먹는 모습 그리며 기꺼이 시간과 정성을 바친. 우리 밥상에 직접 사골 끓여 내오는 사람이 있다면 지극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증거이니 바닥까지 싹싹 비워 마심이 마땅하겠다.

울 할미는 식구 누가 아프기만 하면 소 뼈를 우려냈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나 아버지가 공장 기계에 손목을 눌려 인대가 손상되었을 때, 할아버지 기침이 심해질 때에도 할머니는 소 뼈 곰탕을 끓여 한 주 가량 모든 끼니마다 내왔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곰탕을 가장 많이 마셔본 건 아마 엄마일테다.

내 부모 세대가 으레 그래 왔듯 우리 엄마도 특별한 수혜 없이 시부모 오래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는 좀 안하무인으로 말을 참 못되게 뱉었다. 조금만 수틀려도 갖은 욕설은 물론이고 인신공격이나 비하도 서슴지 않았다. 남편 아래 아내 있고 아들이 세상의 중심인 옛사람으로 고모들 다 출가한 후 성질풀이 대상 삼아 며느리만한 호구가 없었을 거다. 엄마는 하루에도 네댓 번씩 할머니 독설에 휘둘려 살았다. 스물셋에 나를 낳아 납치처럼 시집에 들어온 어린 며느리 혈기는 끓는점에 도달해보지도 못하고 차갑게 식기 일쑤였다. 꼬장꼬장한 노친네 성질머리 앞에서 잘못한 것 없어도 빌어야 했고, 별 것 아닌 일에도 꿇어야 했으니, 울 엄마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으랴.

엄마는 작게 자주 아팠다. 미열 감기는 수시로 달고 살았고 부종도 있어 한 번씩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유난히 생리통이 심할 때에는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제대로 걷지조차 못했다. 주기적인 허리 통증과 어깨 결림까지. 큰 병치레는 없었지만 어디 한 군데 성한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하루 잡아 어떤 증상이든 크게 앓는 날이 매달 한 번은 꼭 찾아왔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꼭 소 뼈 곰탕을 끓였다. 별 다른 생색도 없이, 익숙하게 처리해 온 일처럼. 당시 분식집을 운영하셨는데, 엄마 아픈 날엔 한 시간 정도 일찍 가게를 닫고 정육점에서 소 뼈 잘라와 꼬박 새벽까지 국물을 냈다. 거진 매달 한 번은 한 들통씩 소 뼈 곰국을 끓여냈고, 온 식구는 엄마 덕(?)에 사시사철 보양할 수 있었다.

다만, 소 뼈 곰국을 상에 내올 때 할머니에겐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끓이게 된 이유 ‘누구 때문에’의 주 대상이 되는 사람에겐 대야 같은 대접 가득 퍼 담아 내주는 것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밥공기보다 약간 큰 국그릇 3/2 정도만 담아주었고. 그마저도 들통 반 정도 덜어내면 나머진 주 대상에게만 내주었다. 할머니는 자주 아픈 엄마를 위해 소 뼈 고아내고, 파를 송송 썰어 준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잘 해 준 게 그거였다. 할머니에게 소 뼈 곰국은 쇠한 기력을 보해 기운을 찾게 하는 보약 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할머니 나름 최고의 대우를 제공한 셈이다.

“바쁘다. 먹고 나아 일 손 도와라.”

할머니 엄지가 담겼다 나온 소 뼈 국물을 들이켜며 엄마는 죄송하다고 할 따름이었다. 나는 엄마를 주눅 들게 하는 할머니가 싫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그래도 아프면 챙겨주는 건 할머니밖에 없다며, 돌림자 따라 ‘병용’이가 될 뻔 한 내 이름을 종갓집과 싸워가며 작명소로 달려가 3만 원 주고 ‘창용’으로 바꿔지어 온 사람도 할머니라고,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부분은 나도 감사하게 여긴다. 학창 시절 놀림 받을 거리를 하나 없애준 것과 같으니. 같은 대 친척 형이 ‘병’ 자 돌림을 그대로 쓴 ‘병기’라는 이름 때문에 ‘변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걸 보면 더욱.

어쨌든 엄마는 혈액 성분이 곰국으로 바뀌었다 해도 그러려니 할 만큼 소 뼈 국물을 자주, 많이 먹었다. 꾸준히 마셔댄 할머니 표 보약 덕분인지 엄마는 날이 갈수록 기운찬 철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고에서 부로의 일방적 핍박은, 함께 산 세월 10여 년이 지나며 서서히 고부갈등으로 힘의 평형을 잡아나갔다. 13년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판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생전 살가왔던 서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있음과 없음은 천지차이라 기댈 곳 없어진 탓인지, 어이없을 정도로 매사 당당하던 할머니의 억센 성질이 급격히 사그라든 것이다. 여기 늙음까지 더해져 15년 차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완전히 부의 손아귀에 잡혀 살게 된다.

엄마 적금을 깨게 만들어 고모들 집안 살림에 보태주던 할머니의 몰염치는 온 데 간데없었다. 한 번은 노인정에 찾아온 약장수에게 속아 100만 원짜리 옥장판을 떡하니 사 왔다가 몇 날 며칠 엄마의 잔소리 세례에 찍소리 못하고 수그러들어야만 했다. 엄마는 할머니 손목을 붙들고 약장수 꽁무니를 수소문해 다른 노인정에서 벌어진 사기 장사판을 뒤집어엎고는 기어이 전액을 환불 받았다. 할머니는 대찬 엄마 기운에 눌려 무어라 반발조차 못하고, 엄마 없을 때 몰래 흉보는 처지가 되었다. 독한 년, 모진 년.

한데, 세상 물정 모르던 앳된 며느리가 이만한 억척어멈 경지로 오르기까지 긴 세월 할머니 본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걸 알기나 하시려나?

엄마가 할머니에게 배운 건 그 놈의 성질머리 말고도 또 있었다. 바로 소 뼈 곰국 고아내는 기술이다. 전세가 역전된 후, 이젠 할머니가 잔병을 달고 살았는데 한 번씩 크게 앓는 소리 내실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소 뼈를 고았다. 옥장판 사건 당시에도 환불 받은 돈 일부로 사골을 사 푹 삶아냈다. 엄마가 할머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가족에게 커다란 대접 가득 국물을 퍼주었단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일 년 내내 언제든 드실 수 있도록 국물을 얼려 저장해두었다는 점도.

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듯 근본 없는 상소리까지 지껄이진 못하더라도, 엄마는 할머니에게 충분히 모진 말 쏟으며 젊을 적 당했던 시집살이를 성공적으로 갚아나갔다. 할머니는 심술이 잔뜩 난 네 살 아이처럼 엄마가 싫어하는 일만 부러 골라하듯 했고. 다 같이 먹는 반찬통에 입을 대고 김치 국물을 빨아 드신다거나, 빨랫감을 내놓지 않고 장롱에 모아둔다거나, 동네 영감들에게 몇 푼 되지도 않는 용돈으로 생색을 낸다거나. 다 말하자면 끝도 없을 다양한 종류의 밉보일 행동들을 매일 몇 가지씩 조합하여 반복했다. 그 나이 드시고 절대 고쳐지지 않을 버릇들임에도 엄마는 근성 있게 잔소리를 쏟아냈고.

그러면서도 엄마는 할머니 상차림에 무척 정성 들였다. 대충 있는 반찬 몇 개로 얼버무린 끼니는 단 한 끼도 없었다. 정 먹을 것이 마땅찮은 날에는 냉동실에 상비시킨 소 뼈 곰국이 유용하게 쓰였다.

“노친네 병들면 골치 아프다.”

이게 엄마 논리였지만 실상 소 뼈 우려서 무병장수를 바라랴? 그저 소 뼈 곰국은 엄마와 할머니 사이 암묵의 친목 수단이었던 것 같다. 제 부모 같은 순 없겠지만 그래도 며느리 역시 자식으로 품겠다는 속내를 할머니는 곰국에 담았던 것이고, 그 속정에 담긴 온기 덕에 서운할지언정 몸 아픈 날 서럽지는 않았던 엄마의 기댈 곳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동네잔치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엄마 좋아한다며 백설기를 신문지에 꽁꽁 싸매 들고 오던 할머니와 집에서 부침개라도 부쳐 먹자 하면 할머니가 노인정에 부족함 없이 가져가 생색내실 수 있게 수십 장 탑을 쌓던 엄마. 두 사람 간 소리로 나누는 대화는 늘 날이 서 있었지만, 몰래 하듯 실상 대놓고 서로를 챙기던 행동 덕에 어쩔 땐 꼭 철부지 소녀들이 티격 대듯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식구들이 다 외출한 사이 혼자 목욕을 하려다 돌아가셨다. 욕조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며 뇌손상이 와 쇼크사하셨는데, 목욕을 위해 받아둔 물에 잠겨 퉁퉁 불어 터진 모습을 처음 발견한 게 엄마였다. 엄마는 너무 울어 경찰 진술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상을 치르는 내내 탈진할 만큼 울었고 한없이 자책했다. 맘을 밉게 써서 고약하게 돌아가실 거라 저주했던 자기 말 때문에 할머니가 그토록 끔찍하게 가셨다고.

상을 치르고 모두가 일상으로 복귀했음에도 엄마는 좀체 제 생활을 찾지 못했다. 특히, 얼마간은 화장실만 들어갔다 하면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크게 들려 다른 가족들이 안절부절못할 정도였다. 아빠는 욕조를 바꾸자고 했지만 엄마는 그냥 두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방도 그대로 두었다. 근 반년을 돌아가시기 직전 방 상태 그대로 두었던 것 같다. 어느새 스산한 기운마저 도는 방 안을 엄마는 멍하게 바라보다 문을 닫곤 했다. 사십구재 내내 소 뼈 곰탕이 올랐다.

우는 횟수는 점점 줄었지만 탈상하는 날에는 삼일장 첫날처럼 목청 놓아 우셨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이따금씩 영정 사진을 원망하듯 흘겨보면서. 20년 넘게 엄마를 괴롭혀 온 진절머리 나는 노인네를 비로소 완전히 털어냈는데, 엄마는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너네 할머니 은제 돌아가시냐’며 노친네 오래도 산다 버릇처럼 푸념하던 엄마였는데.

세월 흘러 엄마에게도 며느리가 생겼다. 엄마는 시어머니 아닌 친어머니처럼 생각해 달라며 결코 성립 불가능한 배려를 며느리에게 건네었다. 본인이 받은 시집살이를 한 톨도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다만, 이 좋은 마음을 이상한 말로 표현하는 게 문제.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내가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 제사가 끝난 뒤 엄마는 상 치우려는 며느리를 돌려세워 다그치듯 말했다지.

“너 있어봤자 어수선하고 도움도 안 된다. 남편 데리고 네 엄마한테나 가라. 나는 성질이 급해서 손 서툴고 굼뜬 거 속 터져서 못 본다.”

그렇게 친척 한 명 오기도 전에 부랴부랴 내 쫓기듯 친정으로 가게 된 아내는 혼란스러워했다. 잘해주시는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 상한다고. 실소가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엄마 말본새가 문제 있다는 대답으로 진지하게 아내 편을 들었지만, 어쩜 그리 할머니랑 똑같아졌을까 싶어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할머니가 새삼 그리워지기까지 하더라. 하긴, 처음 아내를 집에 데리고 와 소개하던 날에도 엄마는 소 뼈 곰탕을 대접했었으니.

하지만, 나는 아내를 엄마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아빠처럼 나몰라라 하지 않고 직접 엄마를 상대하고 있다. 좀 피곤한 일이 아니지만 친자식인 나는 대거리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살가웠다면, 아빠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면 엄마와 할머니도 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남편들의 역할 소홀을 소 뼈 곰국이 대신해 주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결론이지만 이젠 곰국을 볼 때마다 어쩐지 아내에게 잘 해야겠다는 다짐부터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