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유래에 대한 적절함에 대한 담론은 잠시 뒤로 하자.

소위 머리 올리다, 머리를 얹다를 언급하기 위함이다. 자칫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거나 통용하여 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구든 언제든 쓰는 말이기에 옮겨 적어본다. 수많은 연습과 생각, 그리고 훈련을 하고 첫 라운딩을 하던 그 때를 이르러 비유하는 이 말이 어쩌면 다른 말을 대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처음 하는 어떤 일을 빗댄 이 말에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의미와 준비가 내포되어 있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골프 연습장을 찾은 건 골프를 시작하자 마음먹고 클럽을 마련한 지 정확하게 1년 6개월 뒤였다. 아마, 골프 클럽을 산 것도 클럽이라도 먼저 사자 다짐한 지 한참 뒤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은 결심은 물론,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실질적인 생활방식의 변화가 있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이 시간이 너무 길어 스스로의 의지력에 대한 정도를 의심하며 자책하는 일도 다반사다. 나만 그렇진 않을테니, 위안이 좀 되는 부분이지만. 그렇게 시작된 골프는 연습장에서 한참의 스윙을 하던 육체와, 언제쯤 필드에 나가 실전을 경험할지에 대한 생각의 따로놀음 이었다.

사실, 난 골프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관념’이 있었다. ‘고정관념’이라고 해도 좋다. 어릴적부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과거는 골프 치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 골프를 유유히 즐기는 자들에대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그것들을 쪼개어 열심히 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쩌면 나도 배가 좀 부르고 등이 따뜻한 여유가 생겼던 그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는 건 아주 맞는 말이다. 우린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눈 앞에 펼쳐진 장관과 그 날의 실수들.

결론부터 말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정도로 실수는 많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은 따로 놀던 어리바리 우왕좌왕의 해프닝은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다만, 그토록 증오하고 아니꼽게 생각하던 골프라는 것을 왜 치게 되었는지 깨달았을 때의 벅참은 아직도 머리와 가슴 속에 선명하다.

우연치 않은 미국 출장 중에, 선배가 그동안 수고했다며 선물로 받은 기회였다. 선배는 역시나 ‘머리 올려준다’는 말을 했다. 필드에서 만난 건 일요일 아침 6시. 눈 앞에 펼쳐진 잔디밭과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하늘과의 맞닿은 그곳에서는 광채가 일었고, 스멀스멀 올라오던 물안개는 그 광채를 분산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물분자들이 공기와 섞여 코로 들어오는 순간 난 생각했다.

 

‘왜, 도대체 왜, 난 골프를 진작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작된 골프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때로는 저조한 성적에, 분수에 넘치는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일상을 해치기도 했지만 그건, 무언가에 빠졌을 때 흔히 일어날법한 그저 그런 정도의 부침이었다. 이제는 골프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즐기고 싶을 때 가끔 즐기는 정도가 되니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연을 벗삼아 필드에 올라섰을 때 떠오르는 ‘머리 올렸을 때’의 감흥은 나에게 또 다른 생활의 활력소인 것이다.

 

이마저도 배부른 소리여서, 골프를 사정상 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골프치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던 과거의 나에게 가장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머리를 올려보면 안다. 스윙과 공의 잘 맞고 그렇지 않음을 떠나, 탁트인 자연과 함께 숨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상쾌하고 청명한지. 그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이 골프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아니꼽게 보는 질투를 마음에 머금고 있지 않나 싶다.

 

언젠가,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즐거움을 함께 느꼈으면하는 오지랖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