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저물다.

살다보니 박세리가 은퇴해서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TV 예능에 나와서 바람이나 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90년대 말 초등학생이던 시절, 88년생인 나는 ‘IMF 가 도대체 뭔데 나라가 망하나’ 하는 광경을 라이브로 지켜보았고, 실제 체감도 했다. 일단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 둘 전학을 갔다. 자고 일어나면 전학 간 친구들이 정말 전교에 한명씩은 있었다. 방학을 하고 개학을 하면 더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더라, 직장을 잃으셨다더라, 그래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더라, 뭐 기타 등등.

실로 우울한 광경이었다.

박찬호 선수와 박세리 선수가 IMF 로 시름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고 달래주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진짜 달래주긴 했을까? 내 생각은 글쎄… 그 시기에 진짜 힘들었던 사람들은 TV로 메이저리그나 골프 볼 시간이나 엄두도 없었을 텐데. 그나마 고되게 일하고 월급받고 주말에 TV로, 혹은 출근하며 신문을 구매해서 해외 스포츠 란을 읽을 여유가 되는 사람들에게나 위로 아니었을까? IMF 로 온 국민이 시름에 빠졌던 시기에 박세리를 보며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어 필드에 골프치러 가셨던 분들은 (실제로 박세리의 영향으로 골프 붐이 일었다) 양심상 힘들었다고 하면 안되는 거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솔직히 나자신도 집이 좀 버텨주고 사는 집안이었어서 망정이지, 그 당시를 떠올리면 우울했던 주변 사람들이 떠오르지 우울했던 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애초에 나라가 싸질러 놓은 빚더미를 왜 스포츠 선수들이 위로해 줘야 되나? 심지어 금도 모았었지. 그거 금 모은 거 다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우리집도 금 몇 개 은행에다 뭐에 홀린 노비마냥 갖다 바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게 정말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기사는 박세리도 박찬호도 아니었다.

타이거 우즈가 지난달 29일 새벽 3시쯤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되었다. 우즈는 음주가 아니라 약물의 혼용 때문이라고 했지만 현지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정신과 의사 애블로 박사는 우즈는 치료가 필요하다며 기고문을 게재했다. 타이거 우즈는 이혼 당시 사생활이 파헤쳐지며 섹스중독으로 알려졌고, 오랜 프로 선수 기간 동안 부상을 달고 살며 진통제와 여러 약물을 달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즈는 최근 몇 년 간은 허리 통증 때문에 풀타임으로 시즌조차 치르지 못했다. 전문가와 팬들은 다들 안타깝고 슬프다는 반응을 보였다. 냉정하게 타이거 우즈가 다시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쥘 확률은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타이거 우즈는 골프라는 산업, 문화, 스포츠의 상징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농구의 마이클 조던처럼. 기사의 댓글에는 ‘골프장 한번 가보지 못했던 내가 타이거 우즈 어퍼컷 세리머니 때문에 골프 팬이 되었다.’ 라는 글이 있었다. 정확하게 타이거 우즈가 어떤 존재인지를 표현한 글이 아닐까 한다. 나도 골프는 몰라도 타이거 우즈는 알았다. 일단 그가 ‘졸라 짱 쎄다’는 건 만천하의 모두가 알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IMF 시절에도 골프계의 진정한 슈퍼스타는 박세리가 아니라 타이거 우즈였다. (박세리 선수의 위상이나 활약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타이거 우즈는 그야말로 ‘아이콘’ 이었으니까.

때문에 박세리의 은퇴는 그저 짠한 느낌이지만, 타이거 우즈의 말년을 바라보는 모습은 더 복합적인 감정이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가 상처받은 맹수처럼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한 세대가 저물었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제는 LPGA에 한국 여자 선수들이 대거 진출해 한국 선수들의 승률이 무려 50%를 넘기는 시대가 왔지만, 타이거 우즈 만한 ‘거물’, 혹은 ‘아이콘’ 이라 할 만한 선수가 누구인지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다. ‘아이콘’ 이라 함은 모름지기 그 스포츠를 모르더라도 그 선수는 알고, 멋있다는 경외감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성기의 우즈는 그야말로 극강이었고, 골프를 모르는 이들조차 그를 보고 경외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골프장 한 번 가본 적 없는 이들조차 경외감에 빠질만한 새 시대의 아이콘은 누가 될지, 이제 저물어버린 아이콘을 보면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