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크고 차갑고 달고 아무튼 결론적으로 자주 땡기는 맛은 아니다. 근데 가끔 땡길 때가 있다. 냉면 위에 삶은 계란이 안올라가면 섭섭함을 넘어서 상도를 어겼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 계란 옆에 있는게 살얼음 동동 띤 배가 아니라 무였다는 걸 알게되면 나도 몰래 배신감에 눈물이 흐른다. 그 눈물에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배의 맛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척집이나 할머니집에 가면 꼭 과일로 사과랑 배를 내 왔다. 어렸을 때는 사과를 더 좋아했는데 요새는 이상하게 배가 그렇게 좋더라. 소화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묘하게 배를 먹으면 진짜로 잠깐 건강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다만 할머니집에서 먹은 배는 미지근했다. 살짝 차갑기까지 하고 육즙이 많아 ‘와사삭’ 하고 베어물었을 때 육즙이 쫙 배어나오는 그런 배, 그런 배가 좋다. 근데 사람 마음이란 게 또 묘해서 그런 차가운 배를 먹다 보면 미지근한 배를 먹던 할머니집의 겨울철 구들장이 생각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부러 미지근한 배를 먹지는 않지만.

배는 묘하게 이성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맛이다. 왜 그런진 나도 모른다. 아마 달기 때문이 아닐까. 달달한 건 보통 감성적이다. 사실 선명한 맛이란 게 거의 대부분 감성적이다. 오감은 오감을 느꼈을 때의 추억과 이미지를 그대로 보존한다. 배의 맛에는 배에 관련된 다른 오감과 추억들이 녹아 있다.

어렸을 때는 몸이 아프고 허약하고 자주 감기에 걸려서 온갖 ‘즙’들을 많이 먹었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즙은 ‘배즙’이다. 배를 어디까지 농축했는지 알수도 없는, 가만 냅두면 거의 고체가 될 것 같은 그 진하고 농축된 배즙은 달다 못해 쓰기까지 했다. 웬만한 감기약보다도 달고 아리고 썼던 그 배즙. 그래서 배 하면 묘하게 감기, 할머니집 구들장, 냉면. 이런 추위나 차가움과 관련된 것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배 하면 이상하게 또,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진다. 할머니집 구들장에 이불을 펴고 들어가 누워서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보챘던 기억, 몸살 걸려서 배즙하나 통째로 털어넣고 누워 끙끙 앓았던 기억, 냉면 원샷 때리고 에어컨 틀고 이불덮고 자다가 등짝맞았던 기억 등등.

달고 차고 미지근하고 쓰고 아리고 춥고 따뜻한, 배의 맛. 이 맛이 아주 가끔씩 땡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