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한 끼 든든하면 되는 세상

혼밥, 혼술.. 무엇이든지 ‘혼자 해내는’ 혼족들은 더 이상 새롭거나 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애초에 교과서에서 ‘핵가족화’를 배웠던 10년쯤 전부터 혼족의 등장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초고령화 사회, 출산율 최저, 학령인구과 생산가능인구의 급락. 혼족들이 대세인 걸 방증하듯,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는 소량 소분, 판매가 트렌드가 되었다. 굳이 한 솥에 우르르 끓여서 한 가족이 모두 모여 며칠씩 먹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한 끼 든든하면 될 일인 세상.

굳이 혼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요즘의 식사 문화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유교 문화권에서 중요시되던 무형의 가치들. 예의, 명분, 체면 같은 것들은 서서히 실용적 관점에서 걸러졌다. 그래도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던 시절에는, 집 앞 슈퍼에서 대충 사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도 기왕이면 직접 만들고, 직접 손으로 빚는 것을 미덕으로 쳤다. 어르신들에 대한 예의, 음식에 대한 예의, 전통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으리라. 하물며 밥상의 주 메뉴인 찌개나 국 같은 음식은 두말해 뭐하랴. 직접 담근 장과 오랜 시간 우린 육수로 팔팔 끓여서 먹어야 제 맛이라고 엄지를 치켜들던 시절.

요즘은 편의점만 가도 예전에는 ‘요리’ 였던 다양한 음식들이 간편한 도시락이나 레토르트 제품으로 나와 있다. 혼자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나마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며칠 두고 먹을 요량이면 직접 찌개를 끓이기도 한다. 하지만,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먹고 싶기는 한데, 번거롭게 일 벌리기는 싫을 때가. 그냥 지금 이 순간, 딱, 먹고 싶을 때가. 그럴 땐, 순두부찌개든 된장찌개든 육개장이든, 편의점에서 산 것을 끓이거나 데워 먹기도 한다. 물론 직접 해먹는 것보다는 맛이 아쉬울 때가 많다.

‘온고지신’ 이란 말도 ‘온고지신’ 하자

하지만, 그런 ‘간편한 찌개’ 제품의 아쉬운 맛이 꼭 전통적인 요리법만이 최고라는 근거가 되진 않는다. 굳이 예전의 그 방식을 고수해야한다면, 안타깝게도 이미 우리네 부엌에서 가마솥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할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정성과 전통이라는 미덕을 앞세워,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예찬하는 것은 어쩐지 전근대적인 발상이 아닌가.

제사 음식이랍시고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고, 가족 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어머니의 팔목을 내걸면서까지 몇 십장의 전을 굽고 튀김을 튀기는 장면. 내 어린 날 명절이나 제삿날의 기억은 조금도 아름답거나 교육적이지 않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그런 걸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만 같았다. 제사상 앞에서 자식들이 서로 얼굴 붉히고, 뒤에서 험담이 오가는 걸 반길 부모가 어디 있겠냔 말이다. 가치 있는 것은 가치로서 기억하고 보존하되, 우리의 생활은 가치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대충 흉내만 내고, 합성 조미료로 역한 맛을 낸 음식이라면 그것이 편의점에서 산 것이든 가마솥에서 끊여낸 것이든 똑같이 외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옛 방식의 장점을 요즘의 기술로 잘 살려내면서, 보관과 유통도 용이하고, 그래서 우리가 굳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제대로 된 요리를 즐길 수 있다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야말로 온고지신의 정신이 잘 구현된 것 아닌가. 그래, 그 ‘온고지신’ 이란 말로 예부터 내려오던 말일 텐데. ‘온고지신’ 이란 말도 ‘온고지신’ 해야하는 시대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우리, ‘찌개는 뚝배기에 끓인 것이 맛있다’ 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뚝배기에 끓이지 않은 찌개는 모두 엉망이야.’ 라는 식으로 논리의 오류를 범하진 말자는 것이다. 만약 뚝배기가 없이도 충분히 맛있다면 축하할 일이니까. 뚝배기를 사지 않고도 맛있는 찌개를 먹을 수 있게 된 거니까.

또 ‘싱싱하고 좋은 재료로 맛을 내야 좋은 음식’ 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는가. 다만 ‘꼭 시장에서 직접 사와서, 직접 다듬고, 직접 썰어 넣어야만 한다.’ 는 괴상한 아집은 버리자는 거다. 믿을 수 있는 곳이,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좋은 재료로 육수를 내고 양념을 했다면 내가 직접 사서 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간편한 게 잘못은 아니니까

나는 찌개 중에선 된장찌개, 된장찌개 중에선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한다. 고소하고 진한 기름기가 섞여 있는 맛. 찌개만 먹어도 고기와 함께 든든해지는 맛. 주로 고깃집에서 마무리 식사로 먹는 편인데, 그 맛을 집에서 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엔 뚝배기도 없고, 된장찌개 한 번 끓여먹자고 한우 차돌박이를 맘 편히 사기도 망설여진다. 혼자 살면서 밖에서 일을 하는 내게 사골 육수를 집에서 내는 건 거의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이 나이 먹고 엄마한테 찌개 끓여달랄 순 없으니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차돌박이 된장찌개, 간편하게 먹으라고 많은 분들이 고생고생해서 나온 게 이렇게 간편한 된장찌개인 셈이다. 그러니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직도 ‘뚝배기에 끓인 찌개’ 만 찌개로 인정하겠다는 분들, 일단 드셔보시고 얘기하자. 성의 없고, 진실 되지 못한 요리가 잘못이지 간편한 건 잘못이 아니다. 온고지신의 지혜를,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