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육군 장성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 좋았던 적이 기억난다. 
중동에 파견되었던 국군부대의 장성이었는데 이분이 식당에서 본 경험담이다. 
식사를 하러 갔는데 여러 나라, 피부색도 다양한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고 했다. 당연하다. 유엔군은 다국적군이니까.  
그는 또 장군으로서 당연히 한국병사들이 밥을 잘먹나 자연스럽게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기겁’을 했다. 한국의 풋풋한 병사들은 미군, 영국군 가리지 않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농담을 하면서 ‘겁없이’ 어울리고 있었던 거다. 조금 더 관찰을 하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아 저건 겁없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거구나. 저 어린 병사들에게는 아예 강국에 대한 핸디캡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 장군은 그때 깨달았다. 오히려 기성세대의 핸디캡이 당당한 신세대에게 잘못된 사고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참을 보다 보니 아 저 아이들이 한국을 끌고갈때쯤이면 한국은 무얼 하든 자신감있고 당당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뿌듯해졌다고 했다.
아직까지 기억이 남아있는 걸 보면 나 역시 그 날 ‘다국적군의 식당’에서 당당했던 한국병사가 왠지 흐뭇했던 것 같다.
변방, 아직 한국에게는 이 단어가 어울린다. 뭐 딱히 이 단어를 싫다고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갖고 있던 자료에서 변방에 대한 생각들을 좀 찾아보았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신영복 교수가 내린 변방에 대한 명쾌한 정의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정의까지 보면 변방이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아직 변방이라는 것은 어떤 문제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단단히 새겨야 할 부분이다. 보자.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가장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그야말로 변방에 지나지 않는다. 중심부에 대한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즉 변방인 한국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혹 있을지 모를 핸디캡 의식을 깡그리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의식, 열등의식을 버리는 것이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가는 자세의 첫번째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의 본모습은 원래 사실 당당했던 것이 아닐까?
싱가폴의 국부 리콴유는 생전에 한국인이 무섭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 보면 검투사 같은 복장을 한 진압 경찰만큼 잘 조직되고 훈련되어 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싸우는 모습은 전투 장면 같다. 그들은 타협할 줄 모르는 맹렬한 성격이고, 권위에 도전할 때는 폭력적이고 정력적이다”
아마도 공격적으로 세계를 향해 수출을 하고 동남아 중동에서 공사를 하던 정열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본 듯하다. 이렇게 겁없던 변방이 결국 기적처럼 3만달러의 고지까지 올라왔다. 저성장이고 세계 불황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 창고에 고이 모셔뒀던 것 중에서 다시 찾아와야 할 것이 몇가지 있다. 그 첫번째가 ‘싱싱한 변방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