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고 싶을 땐, 포기김치 먹자!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설령 그것이 어떤 진리라고 해도 너무 식상해지고 난 다음에는 본래의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같은 말들. 듣기 싫은데 계속 듣다보면 맞는 말인데도 반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택시를 타자’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맞는 말’ 중, 그래도 짜증 대신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것.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 배추 대신 김치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이 말은, ‘포기하지마! 포기하면 큰일 나는 거야!’ 라고 잔소리하고 윽박지르는 대신 우회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뻔하고 유치한 말장난인 걸 알면서도, 왠지 포기하기 싫게 만드는 여운이 있다.

배추 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배추 셀 때 한 포기, 두 포기 해본 적도 거의 없다. 삼십대 미혼 남성이 배추를 포기 채 살 일도 없고, 직접 김치를 담그지도 않으니까. 김치를 사먹을 때에도 소량으로 포장된 제품을 사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고. 그러니까 툭 까놓고 얘기하면, 배추 셀 때보다는 진짜 잘해보려 노력했던 무엇인가를 그만두는, 그런 포기를 더 많이 하며 살아온 거다. 부끄럽게도.

이미 지나온 내 ‘포기’ 경력을 어떻게 되돌릴 순 없다. 그렇다면 김치라기 포기 채 먹어보기로 하자. 이게 무슨 뜬금없는 전개냐고? 맞다, 포기김치 얘기를 하려고 작정하고 글을 쓰고 있다. 하던 걸 그만두는 ‘포기’의 맛은 씁쓸하지만, 단아하게 자리 잡은 한 ‘포기’ 김치의 맛은 경이롭다. 적어도 한국 사람에게, 그 맛은 포기하려던 어떤 것조차 다시 해보고 싶게 만드는 긍정의 맛이다.

포기하고 싶을 땐, 포기김치 먹자

특히 청매실이 들어가면, 김치가 익어가는 동안에도 직설적으로 코끝을 찌르는 신맛이 아니라 풍성하게 숙성된 맛이 난다. 쉽게 무르지 않고 아삭아삭한 식감도 좋다. 시장이 반찬인 것처럼, 정말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대충 뜨거운 쌀밥에 포기김치 쭉 찢어 올려 먹기만 해도 기력이 돈다.

맞다, 김치란 원래 그런 음식이었다. 고기반찬, 계란, 기름국 하나 보기 힘든 어느 가난한 집안에도 늘 김치는 있었다. 그마저도 없는, 정말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웃을 돕기 위해 건네는 음식도 쌀 바로 다음이 김치였다. 김치란 가장 낮은 곳, 가장 힘들 때부터 곁에 있어왔다. 워낙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에서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그런 순간에도, 포기김치 한 쪽 쭉 찢어먹으며 생계를 꾸려가고, 가업을 일으킨 기억이 우리네 유전자에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