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찌는듯한 더위는 물론이요, 장마철을 맞은 물난리 때문에 세상의 소식은 온통 사람들을 집에 잡아두기 위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역시 시원하고 안전한 집 안에서 해야할 일들을 처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창밖을 보는 순간 갑자기, 당장 떠나야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가 아닌 곳, 본 적 없는 곳, 가보지 않은 곳을 봐야 한다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자꾸만 외쳤다. 망설여야할 이유들이 마음을 세우지 못했다. 단숨에 다음날 출발하는 기차를 예매한 뒤 급하게 싼 짐을 어설프게 메고 5일간의 여름 여행을 시작했다.
부산에서부터 삼척까지 바다를 따라 이동하며 난생 처음 만나는 경치를 찾는데 주력했다. 이미 가 본 지역이라도 완전히 낯설기를 바랐다. 그래서 유명 관광지나 꼭 가봐야한다고 알려진 장소보다는 관광책자의 끄트머리 귀퉁이 쯤 있는 장소들을 찾아갔다. 새로움은 사실 그런 식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번 여행의 나에겐 물리적인 낯섦이라도 필요했던 것 같다. 이 곳에서 뭔가 느낄 수 있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바다를 따라 걷는 건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정적인 그림일 수 있다. 인간의 작은 몸집에 비해 바다는 너무 크고, 걷고 걸어도 보이는 모양은 비슷한 것 같으니까. 하지만 실은 한 순간도 같은 모습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출렁이면서 매순간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로든 날 데려가 달라고 손을 뻗듯 마음 속으로 말을 걸며 눈부신 풍경을 오래 눈에 담아두려 애썼다. 걸을 때마다 발 아래 모래가 사각사각 굴렀다.
여행은 언제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준다. 그 느낌이 좋아 일이 막힐 땐 자꾸만 떠나게 된다. 편안한 곳에서 요양하듯 즐기는 여행도 있고 고생스럽게 걷고 뛰고 땀흘리는 여행도 있는 법인데, 내 경우엔 후자를 선호한다. 오히려 평소엔 정적이더라도 여행에서는 쉴새없이 걸으려고 애쓴다. 걸음 하나하나마다 기억이 생긴다. 바닥에서 뛰어오르듯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다. ‘땅’이라는 게 생각보다 강렬하다. 차안에서 눈으로 보는 것도 충분히 좋지만 걸어서 밟은 경치는 보다 영혼에 새겨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다른 건 다 대충 준비해도 신발만큼은 제대로 챙긴다. 대학생때 무턱대고 떠난 국토종주에서 발이 아파 도저히 걸을 수 없게 돼 도중에 신발을 산 적이 있다. 거의 포기할 뻔 했었는데 내게 맞는 신발로 바꾸자 거짓말처럼 다리가 가벼워졌다. 많이 걸어보기 전엔 신발을 단순한 패션/악세서리의 멋내기용 쯤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다른 건 몰라도 신발만큼은 내 발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신중히 고른다. 이번 여행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베낭에 준비물이었지만 신발은 고심해서 가장 편안하고 가벼운 것으로 골라서 떠났다. 종횡무진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훌쩍 쏘다니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신기해하지만 그럴때면 난 이렇게 말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가벼운 마음이랑 가벼운 신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이번 바닷길 여행이 방랑벽에 불을 지핀 것일까. 돌아오자마자 다시 여행길에 오르고 싶어 좀이 쑤신다. 뜨거운 태양에 어울리는 뜨거운 열정 가득한 시간으로 남은 이 여름도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