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요, 제주도,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가 절실한 요즘이다. 이렇게 말하면 뭐 제주도에 애틋한 추억이라도 있는 사람 같지만, 사실 난 태어나서 제주도는 한 번밖에 못 가봤다. 그마저도 십여 년 전 수학여행으로 가본 것이 전부다. 그 당시의 수학여행이란, 그저 중간이나 갈 법한 콘도 따위에서 친구들과 몰래 들고 온 술을 맛도 모른 채 마시고, 시답잖은 진실 게임이나 하다가, 아무 맥락 없이 한라산을 오르는 – 겨우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실질적으로 나는 제주도에 한 번도 안 가본 셈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제주도가 절실한 요즘, 이라고 기꺼이 말하고 싶다. 밀려드는 일의 틈바구니에서 때를 놓친 식사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요즘. 하루 12시간 작업은 기본인 요즘. 숨 쉴 구멍이 필요한 거다. 처음 며칠은 그저 하루나 이틀 정도, 잠이나 푹 자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뿐이었는데, 이런 생활이 몇 주가 지나니 보상심리가 작동한 건지 오히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거다. 아니, ‘어디로’ 가 아니라 ‘제주도’ 로.

이런 ‘제주 앓이’에는 가수 이효리의 제주 라이프도 부지불식간에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본디 어떤 장소가 지니는 고유한 에너지랄까, 이미지 같은 게 있는 법. 부산하면 바다, 전주하면 한옥, 뭐 그런 거. 나에겐 제주하면 휴식이다. 정작 제주에서 쉬어본 적도 없는, 육지 촌뜨기의 로망이랄까.

말리

산등성이의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를 이르는 제주 방언으로 ‘말리’ 라는 단어가 있다. 말리, 어쩐지 이국적인 이 단어가 실은 제주 방언이라서 더욱 좋다. 이 단어를 알아버리고 난 뒤로는 제주도하면 먼저 떠오르는 5개 단어 중에 꼭 ‘말리’가 낀다. 내가 사는 원룸 뒤편에는 황령산이 있고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홍익아파트 뒤편에는 경운산도 있다. 그러니, 사실 말리라는 방언은 그 의미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저 그 어감만으로도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제주를 제대로 가본 적 없는 육지촌뜨기는 괜히 제주에서 생긴 일들은 모두, ‘발리’가 아니라 ‘말리’에서 생긴 일이라고 퉁 쳐보려는 억지를 부리곤 했다. ‘말리’를 곱씹다보면,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강은교 시인의 시가 떠오르기도 하고, No Woman No Cry… 밥 말리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기도 했다.

말리에서 말리를 먹으며 말리에서 생긴 일을 그리워 하기

그래서 제주도에서-아니, 일단 말리라고 하자- 말리에서 만든 말리를 처음 봤을 땐,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했다. 제품을 보자마자 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작명 센스. 과일을 촉촉하고 꾸덕꾸덕하게 잘 ‘말린’ 거였다. ‘말리다’라는 동사를 ‘말린’이나 ‘말림’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말리’ 라는 어간에서 툭 끊은 것이 한 수였다. 골드키위 말리. 얼핏 보면 전부다 영어 같기도 한 것이 전혀 이질감이 없다.

말리를 한 입 먹어보면, 그냥 냅다 말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요즘 같은 땡볕에 옛날 할머님들 마당에 고추 말리듯이 말린 게 아니란 뜻이다. 수분을 날려 건조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쫀득쫀득하고 촉촉한 식감을 유지하도록 아주 잘 말렸다. 식후 입가심용으로 허접한 식당 박하사탕 먹는 것보다 억만 배 낫다. 골드키위 말리. 왜 이렇게 잘 말리? 정말 너무 맛있!

덕분에 제주도를 1도 모르는 육지 촌뜨기에게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게 하나 더 늘었다. 과일 말리. 11월 말까지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일을 해내야 한다. 12월의 제주는 너무 추울 거 같은데. 휴, 나에게도 제주의 어느 말리에서 말리를 먹는 날이 올까. 진짜 제주의 어느 말리에서 생긴 일을 그리워하는 그런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