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입어서 가을

대학 시절, 좀 유별한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교재도 따로 없고, 과제도 정해진 게 없다. 특히 강의 시간에 아주 흥미롭지만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의견을, 마치 그럴싸한 이론으로 둔갑해서 설명하시고는 “이게 누가 말한 걸까? 내가 어제 연구실에서 생각해본 거야.” 라며 능청을 떨곤 하셨다. 그래도 강의는 늘 즐거웠다. 아, 물론 성적은 잘 받지는 못했지만.

그 교수님이 하셨던 얘기 중 하나가 계절 이름의 어원에 대한 것이었다. 교수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계절 이름은 다 세심한 관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어원을 설명하셨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파릇파릇한 풀과 산짐승들이 ‘보여서 봄’, 뜨거울 햇살 아래 과실들이 ‘열리고 여물어서 여름’, 잎이 떨어지고 단풍으로 산들이 옷을 ‘갈아입어서 가을’,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추워서 ‘겨우 살아내는 겨울’. 물론 이것도 강의 마지막에 교수님 본인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고백하셨다. 하지만 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이 썰을 믿고 있다. 일단, 귀엽고 낭만적이고 스토리가 있으니까.

기온은 떨어질 생각을 않고, 2,3일에 한 번 꼴로 폭염주의보, 폭염경보 문자가 날아들지만 어찌되었건 입추는 지났고, 패션 브랜드들도 더 이상 여름 신제품은 제작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그래도 또 너무 갑작스럽게 ‘가을입니다!’ 하기는 민망한 시기라 ‘Pre-Fall’ 이라는 이름으로 올 가을을 패션 트렌드를 점쳐보는 제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등장하고 있다. 슬슬 옷을 ’갈아입어야 할 가을‘ – 미리 알아보는 가을 트렌드 두 가지 핵심 키워드를 살펴보자

Red

카키나 올리브, 세이지 같은 그린 계열이나 탄, 카멜, 초코 같은 브라운 계열 색상이 가을을 대표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레드 계열이라고 해도 보통은 톤 다운된 레드거나 와인 정도가 가을의 색이었는데, 올 가을에는 ‘스칼렛’ 이라고 부르는 다소 밝고 진한 레드가 주목받을 것 같다. 물론 색상의 특성상 남성보단 여성이 더 다양한 아이템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남자도 가을이라고 너무 톤 다운된 색상만 찾을 이유도 전혀 없다.

단, 스칼렛 레드 색상을 활용하려면 가능한 맨투맨 티셔츠, 카디건, 자켓 같은 상의 아이템을 선택하도록 하자. ‘빨간 바지’는 웬만해선 소화해내기 힘드니까. 바지는 톤 다운된 브라운이나 블랙으로 선택해서 전체적인 감도의 조화를 이루면, 스칼렛 레드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코디할 수 있다. 초가을엔 블랙이나 짙은 브라운 색상의 반바지에 긴팔 레드 맨투맨, 그리고 깔끔한 가죽 스니커즈를 매치하면 제대로 ‘Pre-Fall’ 할 수 있을 것.

Check + Check

‘가을하면, 체크’ 라는 공식이 올해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제일 무난한 듯하면서도 사실 센스 있게 입기 참 어려운 게 체크 아이템이다. 잘못 입으면 복학생 공대 오빠, 학년 부상 수학 선생님 되기 딱 좋으니까. 하지만 올 가을 체크 트렌드는 뭔가 다르다. 우선, 패턴이나 굵기가 보다 과감해졌다. 중간 정도 굵기의 체크보다는 아예 아주 잘거나, 아주 큼지막한 체크가 세련된 느낌을 줄 것이다. 그린/네이비 같은 기본 타탄 체크 색상보다는 블랙을 기반으로 하는 색 조합이 강세를 보일 것이다. 블랙/블루, 블랙/레드, 블랙/오렌지, 블랙/옐로우, 블랙/화이트.

또 예전에는 단색 코디에 체크 아이템 하나가 포인트 역할을 했다면, 올 가을에는 서로 다른 굵기의 체크 아이템을 과감히 섞어서 매치하는 것이 트렌드가 될 것이다. (스트라이프 패턴에서도 같은 경향을 보일 것.)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과유불급이라며 체크 아이템의 혼합을 꺼려했는데, 패션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답이 없는 분야라는 걸 새삼 느낀다. 잔 체크 셔츠에 굵은 체크의 자켓을 더하거나, 굵은 체크 바지에 잔 체크 양말을 더하는 식이다. 체크 아이템의 이런 유행. 일단 ‘체크’해두긴 하지만, 글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