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와 처서

8월 7일, 입추라는 절기가 무색할 만큼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졌다. 조상님들 지혜가 담긴 24절기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체감하는 계절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기분이다. 아직 가을은 한참 멀었구나, 싶었는데 비가 한 번 우르르 내리고 나니 금세 기온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시원하거나 하진 않지만, 얼핏 가을이 멀리서 부단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23일 처서엔 정말 더위가 그치려나.

예상하건대, 아마 ‘더위 뚝, 오늘부터 가을!’ 하는 으로 계절이 바뀌진 않을 것 같다. 모든 변화의 Before & After 사이에는 그 나름의 과정이 있는 법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 우리가 환절기라고 부르는 그 틈에서 여름과 가을이 또 몇 번 엎치락뒤치락할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잔병치레를 할 것이고.

환절기에는 어떤 옷을 사야 하나

이런 환절기에는 옷 사는 것도 쉽지 않다. 패션 브랜드들은 소비자에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던지게 된다. 한 쪽에선 여름은 이미 다 지나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가을을 준비하자며 2017 F/W 신제품을 소개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올해의 여름 제품(아직 이월 제품은 아니고, 올해의 신제품이긴 했던)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다, 반팔 티셔츠는 계절을 불문하고 필요하다면서 여름 제품 세일을 진행한다. 정답은 없고, 선택은 오롯이 소비자 몫이다.

나는 이럴 때 주로 F/W 신제품을 구매하는 편이다. 옷을 자주 갈아입는 여름을 이미 이만큼 지내왔다면, 반팔 티셔츠 정도야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을 것이고, 가을이나 겨울에 입는 반팔 티셔츠라고 해봐야 거의 이너웨어로 입는 거니까 정 필요하면 꼭 브랜드 제품이 아니어도 필요할 때 저렴하게 사면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또 무엇보다도, 새 계절을 맞이해서 새 옷을 입는 즐거움은, 시간의 흐름을 반기는 나름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환절기에, 가을을 기다리다

조금 비싸더라도 튼튼하고 질 좋은 맨투맨과, 색감이 차분한 치노 팬츠, 꽉 끼지 않는 레귤 러 핏의 면 셔츠, 길이가 너무 짧지 않고 도톰한 카디건이나 니트, 질 좋은 천연 가죽 로퍼나 워커. 일단 가을이면 이런 아이템들을 먼저 눈여겨본다. 혹시 가을에 결혼식이나, 중요한 경조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다면, 광택이 덜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울 플란넬 슈트와 니트 타이를 고르는 즐거움도 있다. 가을에는 브라운이나 블랙의 가죽 손목시계가 어울린다. 여름보다 무거워지는 옷차림을 대신할 가볍고 동그란 안경과, 가을비를 대비한 차분한 색감의 장우산.

말로만 하면 행복하기까지 한 가을 맞이 쇼핑이 될 텐데, 사실 이런 거, 저런 거 하나하나 따져서 사들이다보면, 한 달 월급은 눈 깜짝할 새에 바닥날 거다. 그러다 보니 쇼핑 목록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 우선순위 중 앞쪽에 있는 몇 개만 늘 사게 된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 집합 단원만 너덜너덜했던 수학의 정석처럼. 환절기, 계절과 계절이 아웅다웅 다투는 시기. 따지고 보면, 환절기 쇼핑이 어려운 이유는 패션 시장의 모순적인 상술이 아니라 넉넉지 못한 내 통장 잔고에 있는 것 아닐까. 그래도 이번 한 달은 정말 치열하게, 열심히 벌었고 평소보다 많은 돈이 입금되어 있다. 가을 쇼핑의 우선순위 목록의 조금 아래쪽까지, 정성스레 밑줄을 그어볼 수 있겠다. 이 환절기에, 기침을 콜록거리며 아직 오지 않은 가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