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타입 바지 한 벌.

얼마 전, 마지막 6년 차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우리 동네 주민 센터로 가서 궁금하지도 않은 동대장님 군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저녁을 먹고, 근처 공영방송국인 KBS를 1시간 정도 지키다 복귀했다. 예외 없이 무료하고, 이유 없이 피곤했던 건, 어쩌면 예비군복 탓이었을까.

사실, 예비군 훈련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군필 남성 여러분, 모두 다 알고 계실 테니까.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끝내고 가장 뿌듯했던 건, 비대해진 몸에 꽉 끼는, 전투력을 급감시키는 전투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게다가 멋스럽지도 않은 옷을 입는 일은 생각보다 괴롭다.

전투복이야 국방의 의무를 위해 나라에서 지급해준 옷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 돈 주고 내 패션을 위해 산 기성복이 몸에 맞지 않을 때는 정말 짜증난다. 가끔 중요한 정장 정도야 맞춤으로 구입한다지만, 일상적인 옷들을 다 맞춤으로 구입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각 브랜드가 지정해둔 사이즈에 내 몸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살이 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사이즈 맞추기 참 어려운 아이템은 셔츠, 자켓, 바지인 것 같다. 셔츠나 자켓은 사이즈가 작으면 거의 고문 수준으로 활동이 제한되고, 너무 크면 남자의 맵시를 살려주지 못한다. 심지어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해서 입어보더라도, 어떤 브랜드는 내 몸에 꼭 편하게 맞는 사이즈가 없을 때도 있다. 바지도 마찬가지. 허리에 맞추면 허벅지가 끼고, 허벅지에 맞추면 허리와 엉덩이가 놀고, 바지 길이, 밑단 폭 등 고려해야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거기다 유행에 따라 핏이나 기준 사이즈가 매년 달라지니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 방에는 각각 구입한 지 2년, 4년 된 치노 팬츠와 데님 팬츠가 모셔져 있다. 모셔져 있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실제로 입지 않는 바지이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우연찮게, 아주 극적으로 맞춤복처럼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만날 때가 있다. 나에겐 그 두 바지가 바로 그런 바지였고, 색이 바래고 가랑이가 헐었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바지를 살 때마다 내 몸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 바지들을 기준으로 허리, 밑위 길이, 바지 기장, 밑단 폭을 수선한다. 수선집에 가서도 대충 이 정도… 가 아니라 정확하게 수선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수선집에서도 한두 번 수선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더 신경써주신다.(고 믿고 있다.) 새로 구입하는 바지의 프로토타입인 것이다.

참고가 될까 하여 정보를 드리자면, 나는 지금 175cm의 키에 87kg, 상의는 105, 하의는 33,34 정도를 착용한다. 바지의 허리는 단면으로 43cm, 허벅지는 밑위가 끝나는 지점에서 수평으로 단면 31cm, 바지 길이는 2cm 폭으로 2번 롤업했을 때 복숭아 뼈가 살짝 보이는 정도, 밑단 폭은 단면 17cm(수선집 사장님은 6과 4분의 3인치라고 하신다.) 로 수선하면 맞춤복 같이 딱 떨어진다. 끼는 곳도, 너무 헐렁하게 펄럭이는 곳도 없다. 나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bro들! 도전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