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5일 수요일부터 29일 일요일까지, 나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보냈다. 뭐 내가 연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각색으로나마 작품에 참가해서 대학로에서 보낸 시간은 새로웠다. 연극을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연극을 하는 이들이 막연하게나마 대학로에 나와 ‘활동’을 하고 싶어하니 그 첫발을 어설프게 내딛은 소감으로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지난 시간 연극을 준비하고, 또 실제 공연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중에 있었(지금도 준비중이다)다. 일상은 언어 공부와 독서, 신체 트레이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러다보니 오히려 신작 희곡을 쓸 시간은 없어져만 갔다. 동시에 공부를 위해 연극을 보는 시간은 늘어갔지만 정작 연극을 하지는 못하니 약간 초조해지던 차였다. 보는 눈만 높아지고 정작 연극을 하려는 용기와 패기는 줄어드니, 초조함이 느는 건 당연할수밖에. 그런 시간이 2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가장 친한 연기자 친구 하나가 이번에 작품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제의를 한 사람은 나보다도 어리고 이제 막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준비하는 동생이었다. 그 동생이 이번에 사람들을 모아서 복학 전에 연극을 하려고 하는데 대학로에서 하는 것을 준비중이다. 자기도 이번에 거기에서 연기를 할 것 같은데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작가 포지션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기에 일단 직접 연락이 오면 그러마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작품은 연극 <필로우맨>으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마틴 맥도너의 작품이었다. 제목은 <The cripple of Inishimaan>, 이니시만의 절름발이라는 작품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서는 한번도 공연된적이 없는 초연작이었다. 이런 작품을 또 어디서 알아가지고 왔는지. 번역은 지인을 통해서 해결했고, 라이센스는 공식적인 매니지먼트사를 통해서 문의를 해 해결했다고 했다. 공연 회차당 9~12만원 정도를 라이센스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자연스레 ‘니네 돈 많냐?’ 라는 말이 나왔고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메꾸는 돈들 그리고 단체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에 더해 조금 놀랐던 건 3명 정도의 팀원들이 연극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이걸 열정이라고 해야할까 무모한 바보짓이라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평소 안면이 없던 사이도 아니었고,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동안 연극을 너무 오랫동안 못해서 초조하던 마음도 거들긴 했었다.

작품 자체는 굉장히 재밌고 애초에 잘 써놨던 작품이었다. 한국에만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여러차례 공연되었고, 영국에서는 영화 해리포터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 주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34년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2차 세계대전 직전으로 흘러가던 격동의 시기, 아일랜드라는 섬나라 그리고 그 섬나라 안에서도 또 작은 섬인 이니시만이라는 섬에 모여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절름발이 장애인 빌리와 뭔가 하나 모자란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곳 작은 섬에 헐리웃에서 영화를 찍으러 온다는 소문이 돌고, 주인공 빌리는 절름발이 장애인 취급이나 받는 이 섬에서 벗어나고자 영화 촬영장에 가려고 한다.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마디로 블랙코미디.

웃으면 안되는 상황, 웃을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을 웃음과 유머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폭력과 욕설은 세상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그저 일상다반사인 사회. 중심부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이면서 국제적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사적 지형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섬을 나가고 싶지만 섬에서 나가지 못하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나 의미있게 다가왔다. 아마 한국 관객들에게도 분명히 의미가 있으리라. 그러나 이 작품을 그대로 대학로에 올리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저 동시대 연극 소개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과감하게 아이들에게 ‘한국화’를 하자고 어필했다. 다행히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1936년 아일랜드 이니시만을 1959년 한국 충남 보령 삽시도로 가져와 수정 및 각색 작업을 거쳤다.

여기저기 연습실을 전전하다가 인연이 닿아 좋은 연습실을 한달 통째로 빌렸고, 순조롭…지는 않은 연습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다들 대학로에서 하는 연극은 처음이다보니 욕심도 많았고, 나이와 경험에서 오는 한계도 많았고. 그래도 다들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연극하는 것 자체에는 꾼들이었다. 우리가 세계적인 거장들보다야 못하지만 자리만 차지하는 연극계 꼰대들보다야 못할 게 뭐가 있으랴. 조금은 오만하지만 그런 자존심으로 자신감으로 하루하루 버텨갔다.

동시에 단체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서 나갔다. 당연하게도 제작비는 계속해서 모자랐고 계속해서 예상 제작비보다 실제로 들고 나가는 돈이 커져나갔다. 어리고 젊은 패기라고는 해도 주축 멤버들은 나이가 30에 가까워(실제로 내나이가 30이다)가는데 연속해서 나가는 단체알바는 사실 자괴감을 계속 들게 했다. 거기다 7명 10명이서 단체알바를 가도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이 50, 60만원이 안될 때는 참. 아무리 연극인들이 가난하게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에서 흑자를 바라면 안되는 아주 개같은 연극계 구조라고는 하지만… 사실 선배들은 우리보다는 나은 처지아니었는가. 일단 당장 연극을 하려는 사람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에 경쟁도 심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그 당시 선배들은 노가다 한달 뛰면 한학기 등록금이 해결되는 시대였는데. 지금이랑 물가도 경쟁도 비교할 수가 없는 세대였다. 하. 참 이런 시대 물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배놈들아- 라며 이를 갈고 말해봐도 별 수가 없었다. 돈은 벌어야지.

어느덧 공연날은 다가오고 극장에 들어와 셋업을 하고 사람들이 객석에 차는 것을 보면서도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약간은 복잡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이게 과연 내가 바라는 걸까. 이게 과연 내가 진정으로 하고싶은 연극의 본질적인 모습인가. 대학로에 나오기만 하면 다인가. 물론 그따위거 대학로같은거 개나 줘버려도 된단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대학로에 나와 공연을 하니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어찌됐든 결론은 계속해서 연극을 해야한다는 것, 연극계 구조를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작품을 써서 내작품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은 전혀 중요한게 아니었다. 대학로고 나발이고, 사실 길거리에서 하더라도 좋은 작품을 내가 써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니까.

나이 25에 군대를 다녀와서, 원래 다니던 지방대는 때려치고 다시 시험을 치고. 휴학은 또 2년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늦은 나이에 졸업했다. 그리고 이제는 30이 다되어 다시 대학로에 나와 첫 연극을 올리며 느끼는 것이 그렇다. 젊음이고 패기고 열정이고, 밖에서 보기에 뭐라고 포장을 하든지간에 나는 그저 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할 뿐이다. 같이 이번에 연극을 하는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걸 열정이나 패기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중간에 이 빌어먹을거 관둬버리고 싶단 얘기를 하루에도 몇 번을 하는데 낯 뜨겁게 열정이니 패기니 하고싶진 않다. 그건 젊음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씌워주는 어쩌면 프레임 같은걸수도 있다.

한계와 절망 좌절을 수도없이 느낀다.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도 그러했고 공연을 한 중에도 그러했고 공연이 끝난 지금도 그러하다. 대학로에 한번 나와 연극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 세계의 모순, 그 세계가 돌아가는 동력과 한계 같은 건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연극은 세상을 바꾼적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동경하는 건 그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그순간만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인정한다. 그 순간은 정말 마약과도 같음을. 하지만 무대의 조명이 끝나고 연극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연극이 어떤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한 적도 없고 사회를 바꾼 적은 더더욱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따위 연극이라는 걸 연극같은 걸 나는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늘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류 샤오보를 기억한다. 공산당 1당독재 체제라는 지옥에서 민주화를 외친, 노벨 평화상 수상식조차 끝내 참가하지 못하고 공산당의 감시 속에 사망한 운동가. 류 샤오보. 왜 뜬금없이 연극 얘기하다 이 사람을 찾느냐고?

지옥이 살기 힘들다고 부르짖는 일은 누구나 할수있다. 그것이 지옥 바깥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혹은 지옥 안에서라도 대충 적응해서 사는 사람이라면. 혹은 지옥에 살면서 호시탐탐 지옥 밖으로 나갈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라면. 입은 누구나 살아서 동동 떠 있다. 어쨌거나 한국이라는 지옥은 입으로 뭘 씨부리는 지 그 자유는 보장해주니까.

그러나 지옥에 살면서 지옥을 바꾸려고 하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류 샤오보 처럼. 연극계가 개같고 연극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내가 바꿀거야. 내가 바꿀거거든. 류 샤오보가 했던 것처럼. 그가 중국을 바꾸진 못했지만, 적어도 언행일치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이다. 지옥에 살면서 지옥을 바꾸려고 사는 삶이라면 뭐 한평생 방바닥이나 긁으며 연극해도 나름 ‘간지’는 나는 인생이니까. 맘껏 당당하게 퇴물 꼰대들 욕하면서 살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연극을 끝낸 지금의 심정은, 오늘도 웰컴 투 헬이다. 지옥에 살면서 지옥을 바꾸려는 사람이 있다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