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의 초기 우리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발견들 속에서 좌절한다.

모든 문은 열려있고, 그 문에는 <가능성>이라고 씌여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문 앞에 서자마자 누군가 문을 잽싸게 닫아버리고, 충격에 의해 떨어져 뒤집힌 푯말을 보면서 어리숙한 팀은 곧 창백해진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계획서에 씌여진 글대로 진행되는 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타협을 이루어내고, 수정된 사업계획서 대로 눈이 충혈된 창업가 대신 무질서가 대표를 맡는다. 무질서는 모두의 신임을 얻는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몇 번의 ‘타협된 최선’ 을 지나다 보면 두 가지 기류가 형성된다. 타협된 최선을 수용하는 기류와 타협된 최선을 수용하지 않는 기류.

무질서는 기류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저 흐르도록 부추길 뿐이다. 타협된 최선을 수용하는 기류의 논리는 일면 타당하다. 그들은 무질서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만든다. “우리의 한계” 라는 슬로건 아래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나타나는 모든 결과에 대해 축배를 든다. 그들의 일은 동기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일의 셀러브레이트가 확실하다. 불분명한 동기와 화려한 셀러브레이트는 강한 유대를 형성시킨다. 기류속의 논리가 너무나 명료하여, 기류에 휩쓸린 사람은 결코 논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저 “이게 우리다” 라는 애드벌룬이 떠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질서가 된다.

타협된 최선을 수용하지 않는 기류는 표류한다. 그들은 타협을 경멸하고 최선을 경멸한다. 그들은 타협된 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새로운 ‘타협된 최선’ 의 기류를 찾아 거기서 다시 표류한다. 때론 몇번의 표류속에 ‘그래, 이게 인생이지’ 라는 타협을 한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타협된 최선’의 수호자가 되기도 한다.

몇몇의 뛰어난 조직은 타협된 최선을 수용하지 않는 기류가 주도한다. 그들은 타협 속에서 잠재된 불만을 목격하고, 그것이 드러난 불평보다 훨씬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선이라는 공허함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것은 결코 만족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질서를 적절히 수용하고 한편 끊임없이 질서를 세운다. 그들의 질서는 다음의 무질서를 위한 단계일 뿐이다. 그들은 조직속에 스며드는 ‘타협된 최선’ 의 경계를 인정하고 다시 혁신시킨다. 질서는 구성원의 타협속에 존재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때론, 질서의 타협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의 허울과 싸우거나, 타협으로 발생된 질서의 비이성을 지적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추구한다.

무질서는 기류를 통제하지 않는다. “타협된 최선” 나름의 질서를 추구한다. 질서는 무질서를 통해 진화하고 무질서는 질서의 최종이다. 무질서는 이미 그 자체로 질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