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좀 뺍시다!

“야, 이거 정말 중요한 순간이야. 긴장해! 정신 놓지마! 힘 내!”

사람들은 말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아마 그들도 뭔가 힘을 얹어주고 싶었을게다. 물론, 남들의 말뿐이 아니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외친다. 정신 바짝 차리자. 이거 실수하면 안된다. 긴장하자 긴장해. 내면의 울림인지 타인의 조언인지도 모를 정도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와 같은 소리는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아 왔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어떤 때는 긴장한 것이 도움이 되어 일을 잘 마무리 했다. 또 어떤 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즉, 긴장하고 힘을 잔뜩 주는 것이 좋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를 속단할 수 없다.

사람은 마음의 편안함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니 긴장과 힘주기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큰 부담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불안’의 주된 요인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끝내 욕구불만과 이상행동을 야기하기도 한다.

 

긴장을 했을 때 잘되고 안되고가 반반이었다면, 마음을 비우거나 긴장을 애써 풀고 무언가에 도전했을 때는 어떨까?

이것 또한 반반이었다. 어떤 때는 오히려 긴장하지 않아서, 힘을 주지 않아서 무언가 매끄러웠던 것 같다. 반대로, 너무 긴장을 하지 않아서 제대로 되지 않은 적이 있고 이내 후회가 몰려온 적도 있다. 스스로 많은 준비를 안했거나, 나의 일인데 남 일 하듯이 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긴장하지 않고 힘을 뺀다는 것은 ‘기술’과 다름 없다. 즉, 적재적소에 알맞은 타이밍에 그것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9회말 2아웃. 상대방 타자석엔 홈런왕이 대타로 들어왔다. 포수가 갑자기 ‘타임’을 외치며 경기를 중단시켰다. 잔뜩 긴장한 투수에게 다가간 포수는 안면 보호대를 머리 뒤로 벗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짧지 않은 대화 속에 갑자기 투수는 공을 들고 있던 오른 손으로 포수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물론, 환하게 웃으면서. 어쩌면 그 웃음은 허탈함이 보일 정도로 가벼웠다. 그 둘의 대화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간 포수는 여느 때처럼 투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투수의 공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홈런왕으로 유명한 그 타자를 삼진 아웃으로 경기를 끝내게 만들었다.

경기 후 인터뷰 시간, 한 기자가 그 포수와 투수 인터뷰를 요청했다. 당연히 기자가 던진 질문은 9회말 2아웃에 타임을 외치고 마운드에서 나눈 대화가 뭐였냐는 거였다.

기자가 물었다.

“아까 투수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했나요? 잘 던지라고 했나요? 세게? 아니면 강속구로 던지라고 했거나. 뭐라고 응원 했나요?”

대답은 포수가 아닌 투수가 했다.

“아니, 이 녀석이 저에게 오더니 대뜸 말하더라고요. 형, 팔에 입은 그 토시. 지금 두 겹 입은거야? 형 추워? 대뜸 이래서 헛웃음이 날 정도였죠. 그런데 그 순간 긴장이 탁 풀리면서 공을 부드럽게 잘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외침을 준다. 물론, 만약 그 투수가 긴장을 빼고 던져서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대로 묻힐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우리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

 

그러니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이러한 ‘힘 빼기의 기술’을 적용해봐야 한다. ‘기술’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대상을 다루는 방법이나 능력을 포함한다. 즉, 수단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알맞을 때에 알맞은 정도로 구사하는 것.

 

악보를 한 번 보자. 악보의 복잡한 기호들은 결국 화음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화음은 높낮이로 완성된다. 삶에는 그렇게 위아래를 오가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말한다. 모든 음표가 항상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불협화음은 우리 삶 어디에나 존재한다. 내가 제 소리를 내도 다른 음표가 치고 들어와 이상한 소리를 낼 수도 있다. 반대로, 잘 잡혀진 화음에 나의 음표가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겠다.

리듬은 ‘힘의 조절’과 음표 사이의 ‘쉼’으로 완성된다. 강박이 있으면 약박이 있다. 그것 자체로도 리듬은 완성된다. 인생의 과정에서 강박과 약박은 구사되어야 옳다. 그리고 중간 중간 놓인 쉼표는 보다 듣기 좋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기술이다. 적재 적소에 놓인 음표. 강박과 약박. 그리고 사이 사이에 있는 쉼표까지. 높낮이와 힘의 조절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는 우리의 이상향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그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다시, ‘힘의 조절’과 ‘쉼’이 필요하다. 항상 힘을 주고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힘을 주는 또다른 원인은 바로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에 실패를 했을 때, 자책의 크기보다 상당한 건 바로 남의 시선에 보일 나의 초라함이다. 그 시선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그 긴장의 크기 이상으로 힘을 주기 시작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곳. 그래서 많은 침략을 당해 뭉칠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운명. 공동체의식이라는 집단 무의식은 우리 피에 흐르고 있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은 안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 다시금 자신이 ‘힘을 주고 살아 갔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니, 자신이 이제는 남의 시선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의식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이젠 힘 빼기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좋겠다.

어려운 사람과의 식사자리에서 우리는 말한다. 소화는 될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 힘을 줘서다. 긴장을 하고 불안해서. 혹시라도 흠잡히진 않을까. 실수 하진 않을까. 그런 자리에서 그저 힘을 빼라고 하면 이것 또한 부담이다. 힘을 빼지 않는게 더 편한 사람들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식하지 않고 힘을 빼고 싶다면, 먹는 밥에 온전히 집중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맛이 느껴지고 그 어려운 사람과 음식에 대해 맛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안되면 말고’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거 안되면 안돼!라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어떠한 상황이든, 그 상황은 각자에게 모두 소중한 절체절명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많은 뉴스와 사건 사고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사실 새롭거나 이목을 끌만한 것들이 아니다. 어디서든 사고가 나고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인류와 역사가 공존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반복되어진’ 일상의 편린이다. 하지만 그토록 회자되는 것의 이유는, 바로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 주위, 각각의 개인에게 적용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산업 혁명, 경제 공황이 그저 한 사건으로 회자 되지만, 그것과 다르지 않은 4차 혁명과 경제 불황은 우리네에게 있어 더 큰 화젯거리다. 굳이 비교하자면 예전의 그것과 지금의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반복되는 역사 속에 같은 부류의 일이라해도 과언이 아닌만큼 닮아 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세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다. 즉, ‘자신’에게 해당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민감하게 된다.

그래서 때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 3자로 봐야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객관화’가 그것이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의 일은 쉽게 결론짓거나 고민에 대해 빠르게 결정하곤 한다. 예를 들어, 연애 문제를 들고 온 후배에게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뭐가 문제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거 뭐 그리 걱정해. 그냥 안되면 마는거지!”도 우리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의 속도와 조언을 자신에게 해본적이 있는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온 머리가 쭈뼛하게 반응하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긴장이 되고 힘은 들어간다. 그러한 자신을 가끔은 객관적으로 한 번 바라보자. 그러면 보인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 앞에서 초라해지고 있고, 왜 그리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를 말이다. 나에게 닥친 것, 내가 풀어야할 숙제, 내가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은 나 스스로 보거나 깨닫기 쉽지 않다.

그러니 너무 힘이 들어갈 땐, 잠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제 3의 인물로 바라보면 힘을 빼기에, 결정을 하기에 수월해질 때가 있다. 그 후에 일어날 결정에 대한 뒷일은 결국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할 짐이자 또 하나의 기회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거나, 잔뜩 힘이 들어가 이도저도 못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결정하고 움직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말고. 안된다는 것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기회이자 시작점이 된다. 잘 되어도 마찬가지다. 잘 되면 잘 된대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각자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힘을 줬는가. 얼마나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살아왔는가. 그래서 우리는 행복했는가? 모든 결과가 좋았나.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 그것을 복기해보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몸과 마음의 경직 상태를.

 

힘을 항상 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항상 너무 힘을 주며 살아왔다는 것. 그러니, 그 반대의 상황을 시도해 보는 것은 꽤 의미가 있다. 하던 것만 하며 살면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작년 이 맘때쯤.

나는 골프를 치고 있었고, 당시는 한동안 골프가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아 많이 속상하던 때였다. 어느 한 Par 3홀에서 나는 잠시 힘을 뺐었다. 긴장하고 힘을 줘봤자 땅이나 팔 것을 많은 학습을 통해 배웠던, 어쩌면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한 힘빼기였을지 모른다. 그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고, 힘줘서 뭐하나…안되면 말고. 어디라도 공은 날아가겠지. 대놓고 비웃진 않지만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잠시 잊기로 했다.

그래서 휘두른 헤드에 맞은 공은 경쾌하게 날아갔다. 내가 어떻게 어떤 각도로 휘둘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과정이 매우 매끄러워 스스로도 놀랐었다. 마침내 그린에 도착한 골프공은 잠시 떨어지는 무게에 땅을 박차고 튀는가 싶더니, 이내 그린에서 사라졌다.

홀인원 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골프가 낭만적으로 쭈욱 잘 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날의 홀인원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줬다. 아직도 그 때 홀인원을 했던 공을 바라보면, 그 동그란 모양에 이목구비가 보이며 그 입이 나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힘 좀 빼라. 안되면 말고지. 망신 당할까 남의 눈 의식하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