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80층, 지상 80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화물 전용 같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누를 수 있는 버튼들이 200개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보통의 꿈이 그렇듯,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역시 보통의 꿈이 그렇듯, 전후 맥락에 개연성은 없고 나는 그저 어떤 층에 내리게 되었다. 그 층에는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이 있었고, 대충 20대~40대 사이의 남녀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지정해준 적은 없지만,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쪽의 빈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았고,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주어진 업무가 없으니 그저 멍하게 있는데, 한 젊은 남자가 저쪽에서 무슨 자료를 들고와서는 내 옆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남자는 루즈 핏의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에 자수로 박혀있는 브랜드 로고를 보니, 두 발바닥 모양이었다.

행텐이었던가… 꿈 속에서 그 브랜드 로고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내 옆의 다른 남자가 그 티셔츠가 마음에 든다며 어디 브랜드 거냐고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행텐’이라고 말하면서, 옛날에 잘 나가다가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최근에 과감하게 핏을 수정하고 다시 뜨고 있다면서, 이런 브랜드를 ‘점핑 브랜드’라고 했다. 꿈 속에서 나는 그 얘길 듣자마자, 이걸로 칼럼을 하나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핑 브랜드’. 다시 도약하는 브랜드. 나는 꿈속에서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으로 ‘점핑 브랜드’ 라는 단어를 메모했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송년회 명분으로 이틀 내내 과음을 한 탓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너무 생생했다. 특히, 그 ‘점핑 브랜드’라는 단어가.

해몽

숙취에 찌든 몸으로, 잠에서 깨자마자 스마트 폰을 찾았다. 충전기를 꽂지도 않고 잠든 탓에 배터리는 6%뿐이었지만, ‘점핑 브랜드’를 검색해보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정말로, ‘망해가던 브랜드가 어떤 혁신과 변화로 재도약하는 경우’를 ‘점핑 브랜드’라고 부르는 게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소름 돋는 일 아닌가. 당장 칼럼 거리를 하나 얻었다는 사실 외에도, 무의식의 무대에서 내가 알지 못하던 지식을 얻게 된 셈이니까. 하지만 ‘점핑 브랜드’라는 단어는 없었다. 검색창에는 실내 1인용 트램펄린 제품들만이(그런 걸 ‘점핑 휘트니스’라고 하더라.) 줄줄이 이어질 뿐이었다.

점핑 브랜드, 아주 유치하긴 하지만 직관적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용어가 따로 있으려나. 내 미천한 지식과 검색능력으로는 ‘재기에 성공한 브랜드’를 칭하는 용어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비슷한 현상을 뜻하는 말로는 ‘브랜드 리뉴얼’ 정도가 되겠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용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끼리는 그냥 ‘점핑 브랜드’라고 불러보자. 추락하던 브랜드가 다시 ‘점프!’ 했다는 뜻으로다가. 아무튼 이 전후 맥락 없는 개꿈(?)을 굳이 해몽하자면, 이번 칼럼에서 ‘점핑 브랜드’에 대해 적어보라는, 어떤 계시가 아닐까.

‘점핑 브랜드’의 성공 사례

  1. FILA

필라, 휠라, 뭐 읽고 싶은 대로 읽곤 했던 브랜드다. 지역마다, 또 연령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이모나 어머님 세대 때 반짝 유행했다가 또 내가 중학생 시절에 좀 잘나간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휠라 가방이 반짝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휠라는 뭐랄까, 분명 존재하긴 하는데, 매장은 찾아보기 힘든 브랜드였다. 가끔 홈쇼핑에 트레이닝복 세트나 이너웨어 세트로만 등장하는 정도.

애초에 휠라는 10대~50대까지 전 연령을 아우르려는 대찬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야망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것이, 당장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정상급 스포츠 브랜드의 경우 그보다 더 넓은, 거의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휠라는 그러지 못했다. 특히 스포츠 브랜드의 주요 소비층인 10대~30대에게 외면당하면서, 당장 떠올리려해도 열 손가락 안에 들기 어려울 만큼 인지도가 떨어져 갔다.

2016년 봄, 휠라는 브랜드 정비에 들어갔다. 주요 타켓 연령층을 10대~20대로 구체화하고 그에 맞는 제품군(기본 로고 티셔츠, 운동화, 패딩 등등)을 전면에 앞세웠다. 젊은 감각을 드러내고, 타켓층과 소통하기 위해 SNS에서도 활발한 바이럴 광고를 내보냈고, 가격까지 저렴하게 낮추면서 경쟁력을 갖췄다. 그 결과 휠라코리아는 올해 1분기 매출액 6537억원, 영업이익 489억원을 올려 지난 해 이래 최대 분기 실적을 기록했다. 2016년 1분기 매출액이 1682억원, 영업이익 63억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점핑’했다고 볼 수 있겠다.

  1. GUCCI

사실, 구찌라는 명품 브랜드가 ‘침체기’를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와닿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살 사람들은 사는 게 명품 아닌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품이라고는 사본 적 없는 나 같은 서민도 ‘구찌의 디자인’하면 올드하고 거기서 거기라는, 어쩐지 40대 이상이 착용한다는, 그런 선입견이 있을 정도였으니 구태의 늪에 빠져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던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무명 디자이너인 알렉산더 미켈레가 발탁된 이후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브랜드 고유의 메인 컬러는 유지하되, 보다 산뜻하고 젊은 감성을 더했고, 벌, 호랑이, 뱀 등의 자수를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내세우면서 기존의 올드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구찌의 매출은 2017 회계년도 1/4분기에 전년도 같은 분기 대비 48.3%나 더 높였다.

점핑에 실패한 브랜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블랙스미스는 초창기 호황 이후 정체기를 겪던 2014년 스타셰프 오세득씨를 영입, 브랜드를 ‘블랙스미스 바이 줄라이’로 리뉴얼하면서 재도약을 꿈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블랙스미스는 직영 매장이 모두 문을 닫았고, 서울의 강남역 등 주요 상권에서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개인적으로 어떤 브랜드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브랜드의 ‘생명’이 부여되는 출발선이라고 믿는 내 입장에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블랙스미스를 그리워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은 꽤 안타깝다.

국내 스포츠브랜드 중 그래도 가장 탄탄한 전통과 입지를 갖고 있다고 평가 받는 프로스펙스. 브랜드 로고를 바꾼 뒤, 기존의 ‘카피형 디자인’에서 벗어나 브랜드 특유의 디자인을 출시하기도 하고, 김연아 같은 거물급 유명인을 앞세우면서 나름의 세련됨을 갖추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전통성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쉬웠던 걸까? 레트로 열풍이 막 불기 시작했던 3,4년 전부터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라인을 아주 고급스럽게 광고하기 시작했다. 런닝화의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디자인, 질 좋은 가죽과 메시의 조화, 큼지막하게 박힌 과거 프로스펙스의 로고까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비자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레트로 열풍이 최고조에 이른 올해 전반기에 다시 한 번, ‘헤리티지 라인’ 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인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