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들의 탄생 비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중략)…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 (후략)’

초등학생 때부터 동시를 좋아했고, 반항과 격동의 중2병을 시를 쓰는 일로 앓았던 터라 고등학생이 된 이후 문학 시간은 내게 공부라기보다는 감상의 시간이었다. 많은 시들이 절절하고 감탄스러웠지만, 그 중에서도 당시의 내가 읽자마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시 2편을 꼽는다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와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다. 쉽고 일상적인 단어로, 애타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하는 것.

성인이 된 후, 진은영, 이정록, 이규리, 서영식, 박준 등등 많지 않은 몇몇 시인들의 시에 빠졌지만, 적어도 내가 적고 싶은 슬픔의 롤 모델은 ‘즐거운 편지’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었다. 그런데, 이후 우연히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라는 책을 읽고, ‘너를 기다리는 동안’ 작품의 탄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강은교 시인)
이 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착상이 떠올랐는지요?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구체적으로 답해주십시오.

황지우 시인)
“이 시는 1986년 11월 어느 날 중앙일보 사옥 내 계간 <문예중앙>에 속한 한 빈 책상 위에서 씌어졌습니다. 그 당시 나는 건국대 사태 이후 5공의 탄압 국면이 날로 극성을 부리던 때 어떤 일 때문에 지명 수배되어 이른바 ‘도바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주로 안전지대인 신문사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잡지사 잡글도 쓰고 하면서 노닥거렸죠. 그런데 하루는 그 신문사에 딸린, 무슨 하이틴 잡지에 근무하는 선배 시인이 <문예중앙> 부서를 지나가다가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5분 걸렸을까요, 쓰윽 긁어서 줬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독자를 경멸하면서 함부로 써버린, 이 무시 받고 망각된 시를 내가 다시 의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듬해 봄이었습니다. 친구 부인이 모 대학가 앞에서 그 당시 불온시 되던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뭣이냐, 너를 기다린다나 어쩐대나 하는 시가 어느 시집에 있느냐고 물어오는 거였어요. 그게 성우 출신 김세원 씨가 어느 FM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여러 사람이 와서 찾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핏 수치심 같은 걸 느꼈습니다. 2001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그해 8월 서울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날 아침, 차를 몰고 학교로 가다가 나는 한 FM 라디오에서 50년 동안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역사의 슬픈 객들을 위해 이 시가 음송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 매우 객관적인 매체에 의해 들려지는 내 시가 내 귀에 아주 낯설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강은교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 中

처음엔 조금, 허망한 기분도 들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렇게 달달 외웠던 시 속의 ‘너’가 ‘절절히 사랑하는 이’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5분 만에 ‘긁은’ 글의 정체모를 대상이었다니.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설레어하다가, 상대방의 진의를 알고 난 뒤 밀려드는 민망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물론 본인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의도치 않았던 황지우 시인 본인이 느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더했겠지. 하지만, 결국 그렇게 휘갈겨 쓴 시가 민족의 상처를 달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시를 쓴 본인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더 정확하게는, 부끄러워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황지우 시인 본인의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사례가 가요에도 있었다. 카니발의 ‘거위의 꿈’ – 이적과 김동률의 목소리로 알려진 뒤, 인순이가 리메이크하면서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 국민가요로 등극한 곡. 도전, 위로, 청춘, 그런 키워드들의 집합체. 그러나 정작 이 곡의 가사를 쓴 이적은 힐링캠프에 출연해 작사 당시의 비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적)
“이 노래 가사를 썼던 날이 기억이 난다. 김동률이 곡을 만들어 놓곤 저에게 ‘가사를 붙이라’고 했다. 그러곤 뒤에 서서 빨리 쓰라고 재촉했다. 압박에 의해 나온 가사다. 당시 23살이었다. 가수를 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했던 비웃음을 생각하며 썼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인순이 선배님이 리메이크해서 부르니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세계를 돌아 아프리카 아이들이 부르는 걸 보니 이 가사를 썼던 내가 부끄럽더라. 난 마감에 쫓기듯 가사를 썼는데..”

– <힐링 캠프> 102회 中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너를 기다리는 동안’과 ‘거위의 꿈’의 탄생 비화를 들으면서, ‘내가 만들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열 달을 몸에 품고 생살을 찢어 세상에 낸 자식도 영영 부모의 것일 수만은 없는데, 하물며 내가 만든 것들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것들’을 만들어야 할까.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다가 일기도 아니고 푸념도 아닌, 나름대로는 정성들여 쓴 글이니 좀 읽어달라는 마음으로 참 많은 잡문을 올리곤 했다. 대부분은 오프라인 상에서 실제 친분이 있는 지인들의 눈요기 정도(그 정도의 몫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였을 것이라 뭐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미친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서울시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게재할 시민 시 공모전에 당선이 되어서 처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내 글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 적이 있었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들도
열렬히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빠르게 뒤로 감겨가는 생의 컨베이어 벨트
그대는 그대의 좌절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희망을 심으며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다 괜찮다.

– 김경빈 <위로>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로는, ‘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글이었다. 그냥, 말 그대로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출퇴근길의 직장인에게, 수험생에게, 임산부에게,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두에게. 허접한 이 글이 아직도 서울의 어느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내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지, 아니, 내 글을 정성들여 읽어준 사람이 있기는 했었는지조차도 모를 일이다. 한때는 참 궁금했다. 그래서 한때는 페이스북에서 자랑도 했다.

그런데, ‘너를 기다리는 동안’과 ‘거위의 꿈’의 탄생 비화를 알고 나서는 어찌되었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서울의 어느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있는 내 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 글을 쓰는 일에 훨씬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세상 밖으로 나서는 순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