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 하아아아푸움.

가끔, SNS 타임라인을 별 생각 없이 휙휙, 넘기다보면 ‘뭐 이런 걸 다…?’하는 생각이 드는 조사 결과가 제목인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된다.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옆 사람 하품할 때 따라하지 않는 사람 ‘사이코패스’ 확률 높다” (연구)- 였다. 친히 (연구) 라는 표시를 하며 얼마나 공신력 있는 기사인지를 드러내는 친절함(?)까지 갖췄다. ‘뭐 이런 걸 다…’하면서도 굳이 클릭해서 들어가 보게 만드는 것이, 또 이런 기사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어쨌든 ‘인사이트’ 매체의 1월 31일자, 김나영 기자님께서 쓴 기사 내용은 이랬다. 미국 베일러 대학교 연구진이 학생 135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공감 능력이 떨어질수록 하품의 전염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러니 공감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결여된 사이코패스의 경우 옆 사람이 하품하더라도 따라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내용을 다 읽어봐도 내 머릿속엔 여전히 ‘아니, 그러니까 미국의 대학에서 뭐 이런 걸 다…’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연구를 이끈 브라이언 런들 박사의 지극히 당연하고도 노파심 가득한 한 마디. “하지만 아무리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단순히 하품을 따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좀 더 면밀한 검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길 바란다.”

하품, 아니 하아아아푸움이 나는 기사였다. 다행이다. 누가 읽어도 하품이 날 만한 기사를 읽고 나도 하품을 했으니. 사이코패스는 아닌 걸로.

감정의 전염성

사실 하품의 전염성이 강하다는 정도는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품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일상의 감정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전염성을 발휘한다. (아, 우리가 서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가장 평범한 예로, 관객을 앞에 두지 않은 시트콤이나 드라마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웃음소리를 삽입하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내 여자 친구는 누가 울면 전후 사정을 몰라도 일단 눈물이 난다고 하더라. (여자 친구 핑계를 댔지만, 사실 나도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많은 편이라 우린 한 명이 울면, 대책 없이 둘 다 울어야 하는 커플이다.) 그러니,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주변에 행복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자 친구는 대학교의 학부 사무실에서 조교로 근무하는데 전공 교수님들 중, H 교수님 덕에 요즘 그런 행복 바이러스를 얻어온다고 했다. H 교수님은 서른 후반의 여자 교수님이신데,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싱가포르에서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지금의 대학으로 오셨단다. 얘길 들어보면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소녀 감성’을 가진 분이신데, 특히나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특히 ‘망개떡 에피소드‘는 전해 듣는 나까지 묘한 행복감에 젖게 만들었다.

신년 새 학기를 준비하면서 학부 사무실 직원과 전체 학부 교수님들이 점심 직후에 간단한 간담회 자리를 가졌는데, 학교 인근의 떡집에서 주문한 망개떡을 주전부리로 준비했었단다. H 교수님은 그 망개떡의 맛에 폭 빠져서, 간담회 내내 망개떡의 출처를 궁금해 하셨고 간담회가 끝나자마자 내 여자 친구에게 물어 떡집 위치를 알아내셨다. 당일 강의와 연구 내내 퇴근 후 망개떡을 사먹을 생각에 부풀어 계시다가 퇴근하자마자 그 떡집으로 달려갔는데, 예상보다 떡 가격이 좀 셌나보다. 열댓 개, 한 가득 사려던 H 교수님은 딱 망개떡 4개만 사서 품에 꼭 안고 집으로 가셨다.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그 망개떡을 보며 침만 꼴딱 삼키다가, 밤늦게 퇴근한 남편과 2개씩 나눠 먹었는데, 그 순간이 어찌나 행복했던지 앞으로 H 교수님의 ‘힐링 푸드’ 0순위에 망개떡이 올랐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듣는 내내 장면, 장면이 눈에 떠올랐다.(심지어 난 H 교수님을 뵌 적도 없는데!) 사실 나 같은 어쭙잖은 글쟁이 입장에선 ‘교수’ 라는 직업이 망개떡 정도에 일희일비하기엔 부나 명예를 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H 교수님에게 인간적인 애정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나도 모르게 편협하고 자격지심에 찌들어 있는 ‘나라는 사람의 그릇’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행복의 잔, 절망의 솥

사람의 그릇, 하니까 태어나 처음 사주를 보러간 역학원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평생에 운은 없습니다. 뭐든 날로 먹을 사주는 아니라는 겁니다. 대신에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보상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대기만성 형이라는 거지요.” 아버지뻘 되시는 역학원 원장님께서 꼬박, 꼬박 나를 ‘선생님’으로 칭해 주시는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평생에 운이 없다’는 말에는 솔직히 좀 좌절했다. 30년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부정해온 사실에 못 박히는 기분이 들어서. 아무튼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었다.

‘대기만성 형’이라고 하길래, 열심히 내 그릇을 키워봐야겠다는 생각은 해왔다. 그런데 여자친구에게서 H 교수님 얘기를 듣고 문득, 예전에 썼던 표현이 떠올랐다. “행복의 잔, 절망의 솥” 예전엔 ‘사람의 그릇’ 이라고 하면, 나 스스로가 그릇이 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스스로 그릇이 아니라 그릇을 빚는 존재들이어야 하는 거 아닐까. 가령, ‘대기만성’ 이라고 할 때, 그릇이 크고 깊고 넓어서 좋은 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불편하거나 불리한 점도 있지 않을까. 살면서 한 번도 ‘꽉 채워지는, 막 차고 넘치는’ 그런 경험을 못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나는 ‘그릇’ 대신, ‘그릇을 빚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억수 같은 절망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사소한 한 줌 행복에도 기쁨과 감사함이 흘러넘칠 수 있도록, 행복의 그릇은 작은 잔으로, 절망의 그릇은 커다란 솥으로 빚는 사람. 그럼 내 옆에 아무리 큰 절망이 다가와서 전염돼도 흔들리지 않고, ‘H 교수님의 망개떡 에피소드’처럼 정말 작은 행복을 전해 듣기만 해도 행복의 잔이 한가득 흘러넘칠 수 있겠지. 벌써 서른, 이제 어떤 그릇을 어떻게 빚을지도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