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지친 몸을 일으켜 출근을 위해 욕실로 향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반쯤 뜬 눈으로 칫솔을 집어 들었다. 오른손으로 치약을 들어 칫솔모에 짜려던 찰나. 빼꼼히 나온 치약 한 덩이가 힘 없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치약을 짜서 칫솔에 묻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내 나이를 고려해서, 스스로 양치질을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아침에 치약을 짠 횟수를 헤아려 보면 대략 1만 5천 번 이상이다. 그토록 반복한 일을, 게다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에 실수를 한 것이다. 이게 뭐라고.

 

짜증이 몰려왔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 했다. 아마, 평소라면 곧바로 치약을 다시 짜냈겠지만 사람이란 고달플 때 ‘의미’를 떠올린다. 바쁜 아침이었지만,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해외법인에서 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새로운 곳에서 단기간 내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부담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리를 잡기 위해선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즉, 일을 잘해야 하고 새로운 조직 내에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주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잘 포지셔닝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 아마도 그래서 뭐든 잘해야겠다는 무의식이 온 세포를 지배했으리라.

 

그 날 아침. 치약을 떨어뜨린 순간 그렇게 난 뭐든 잘하려는 무거운 마음을 가진 나와 조우했다.

 

‘인정’이라는 무서운 달콤함

 

직장인은 ‘월급’과 ‘승진’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그 둘이 없는 직장엔 다닐 필요가 없다. 월급도 안 나오고, 승진도 안 시켜 주는 곳에서 일할 사람은 많지 않다. 특별한 사명감이 없다면. 범위를 보통 직장인이라는데 한정하면,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월급’과 ‘승진’을 가능하게 하는 건 바로 ‘인정’이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면 그 사람은 탄탄대로를 걸을 가능성이 높다. 승진은 물론, 고액 연봉까지 거머쥐면서 말이다.

 

‘인정’받고 싶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질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정’ 받는 것에 익숙했다. 태어나서 인정받고, 배냇짓에, 뒤집기에, 걸음마라도 시작하면 온 가족이 달려와 칭찬과 박수를 쳐준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그러한 ‘인정’을 받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경쟁 사회로 접어들고, 누구보다 잘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 무언가 ‘성과’를 내보여야 ‘인정’받을까 말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여 속이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인정’을 갈구하며 살고 있다.

 

아마도 나는 ‘인정’ 받는 길이 ‘뭐든 잘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완벽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뭐든 실수나 사고 없이 해내려 조마조마해왔다. 그 일을 그르치면, 혹시라도 주위 사람들이 실망할까 그래서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인정’받지 못하면 어떡할까라는 두려움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이다.

 

물론, 뭐든 잘 해낸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인정’을 받기 위해 해왔던 일이 잘되면서 많은 ‘인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잘 해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을 잃으면 안 된다. 우리네 인생은 결국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내가 있어야 남도 도울 수 있다. 지나친 ‘인정’에 대한 갈망은 나를 위해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 본질이 변질된다. 무언가를 잘 해내었어도 항상 불안하고 뭔가 행복하지 않은 느낌. 만족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뭐든지 항상 잘 할 필요 없다

나를 위한 ‘의미’ 찾기가 더 중요하다.

 

치약을 흘리고 난 뒤, 다시 치약을 짜낼 때까지의 시간은 아마도 1분 몇십 초였던 것 같다.

하지만, 주마등처럼 지나간 많은 생각들이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마음의 무게감. 뭐든 잘하려고 스스로를 짓눌렀던 부담감. 잘못되면 어쩌지,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공포. 하지만 난 대체 무엇을 잘하려고 하고 있고, 누구를 위해 그러고 있고 왜 그렇게 해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시나 답은 나를 위해 움직이고 다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다음이다. 나에게 받는 ‘인정’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나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은 나를 버릴 수 있어도, 나는 나를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결국 마지막의 순간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내가 되어야 한다. 남에게 맞추기 위해 무언가를 잘 해내야 한다는 건 정도껏 해야 한다. 부모님의 기대, 상사의 기대, 회사가 나에게 기대하는 정도. 뭐든 잘 해내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마지막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굴 위해? 바로 나를 위해서다. 그래서 잘 해내면 모두가 행복하고 좋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더라도 나는 나를 토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 된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피카소가 화가로서의 목표를 1,000개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잡았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이전보다 나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끝’은 없었다. 매일이 어제보다 나아야 했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야 하는 목표. 즉, 인생은 ‘과정’인 것이다. 당장 취업을 하면 끝일 것 같지만, 취업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 은퇴하면 끝날 것 같지만 은퇴 뒤의 생활을 더 잘 준비해야 한다. 무언가를 잘 해내면 끝이 것 같지만, 그다음엔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그러니, 뭐든지 항상 잘해서 ‘끝내려는 마음’은 애진작 잊어야 한다. 모든 것이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들은 조마조마해한다.

 

이렇게 말하고도 나는 또 내일 ‘인정’받기 위해 조마조마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끝’이 아닌 ‘과정’임을 되새기고 매 순간순간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뭐든, 항상 잘 할 필요 없으며 항상 잘 해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음을 다시 한번 더 상기하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을 남기며 다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며칠 후, 몇 년 후 이 글을 읽는 다면 이러한 다짐을 잊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이 글을 읽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힘 없이 스르르 떨어진 치약에게 어쩐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