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가 뭐든 자기 맘대로 흘러갈수 있는 법은 아니라지만, 사실 요 몇 년은 본업에 관해서라면 상당히 깝깝한 시간이었다. 내 본업은 누차 말해왔지만 극작가이다. 그것도 연극 대본을 쓰는 작가. 이 말을 어디가서 하면 꼭 물어보는 말들이 있다.

“그럼 지금 대학로에서 하고 있는 거에요?”

나도 연극을 하기 전까지는 대학로에서 연극 하는 게 쉬운 건 줄 알았지. 대학로는 극장 대관료부터 비싸서 사실 공연할 엄두조차 잘 나지 않는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기획력이 잘 되어있고, 그만큼 상업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연극들을 추구한다. 한번 대학로에서 공연을 친구들과 딱 한번 해본적이 있는데 나름 즐겁기는 했지만 ‘이 공연의 끝이 적자일 것을 100%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사실 근본적으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단체 알바를 몇 개를 했으며, 지분이 큰 사람들은 사비로 100만원 200만원씩을 쾌척했고, 그마저도 다시 회수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보장이 없는.

한마디로 대학로에서 풋내기들이 공연을 한다는 것은 공연을 제작하는 데 드는 최소 400 ~ 500만원 이상의(극장 대관료부터 연습실 대관료를 포함한, 구성원들에게 돌아갈 페이는 전혀 끼워넣지 않은) 돈을 전혀 회수할 가능성 없이 ‘그냥 써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영세 연극업자들은 일단 이 ‘극장’ 과 ‘연습실’의 대관료를 최대한 깎거나 면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제작비도 공공단체 혹은 기업의 공모전들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지만 개뿔, 이 좁은 나라에 한 해 예술대학교 전공자들만 졸업생들이 몇천명씩 배출되는데. 그마저도 경쟁이 심해서 남의 돈 타내기는 쉽지가 않은 현실이다. 사실 애초에 그렇게 남의 돈 가지고 연극을 올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한 지 이제 3년. 학교 안에서 뭔가 집단을 만들어서 졸업하지를 못했었고, 졸업 후에는 이런저런 난관들이 겹쳐서 내가 쓴 작품을 밖에서 공연해본 적은 없다. 한번 공연 계약 단계까지 간 적은 있으나 그마저도 중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엎어졌다.

그럼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또 의문의 질문을 던진다.

“그럼 작가 맞아요?”

사실 극작가는 대본을 쓰는 것 만으로 크게 의미를 가질수는 없다. 나는 극작가지만 어디 가서는 연극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극인에게는 연극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존재 의미다. 나는 그 연극을 지난 3년간 1편밖에 참여하지를 못했다. 물론 신작은 꾸준히 1년에 1편씩 써댔다. 그리고 그렇게 쓴 대본들이 공연화가 되지 않는 세월이 3년이 지나면서 정말 꾸준히 괴로웠다. 극작가에게 자기 작품이 공연화되지 않는 것 만큼이나 속으로 불을 삼키는 것 같은 답답함은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공연되지 않을 연극 대본이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런 대본을 계속 쓰는 작업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극작을 배우면서 느낀 것들 중 하나는 첫째가 극작가가 쓰는 연극 대본은 그저 조립설명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립설명서만으로는 전혀 문학성을 획득할 수 없다. 목적이 공연화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성을 노려서도 안된다. 문학성보다는 절대적인 정확성과 공연화에 적절한 지시성이 생명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쓴 조립설명서는 문학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사실 내가 학교에서 읽었던 수많은 희곡들은 정말 극도로 정교한 조립설명서이면서, 극도로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이었다. 어쨌거나 본질은 문학보다는 기술적인 기능공들의 설명서에 가깝다는 게 핵심이다. 나는 단순히 문학성만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문학성보다도 연극성을 획득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공연이 올라가야 하는데, 올리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니.

극작을 배우면서 느낀 두 번째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다르게 희곡, 그러니까 연극의 경우, 작가가 죽은 다음에 유명해지고 재평가 받는 경우 따위는 없다는 절망적이면서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저 고리짝 그리스의 소포클레스 영감탱이부터, 쉐익스피어, 몰리에르, 해롤드 핀터, 안톤 체홉, 사무엘 베케트, 테네시 윌리엄스 등등등. 정말 기라성같은, 극도로 아름다워서 문학성마저 획득했던 조립설명서를 썼던 극작가들이 다 당대에 유명했고, 당대에 쓴 작품들이 세대를 뛰어넘어서도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클래식’ 즉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소설같은 장르에서야 비록 살아서는 빛을 못봐도 죽어서 재평가 받는 경우가 워낙 허다하다. 프란츠 카프카 같은 케이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모비딕> 즉 그 유명한 고래잡이 소설 ‘백경’의 허먼 멜빌조차도 당대에는 그저 별 의미없는 두껍고 긴 특이한 해양 소설을 쓴 아저씨 정도 취급받았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양반은 죽어서야 재평가를 받았다. 사실 살아있을때는 이런 사람이 있는지도 본토의 미국인들은 잘 몰랐을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계속 연극을 못하는 연극인, 대본이 공연화되지 않고 있는 극작가, 그럼에도 신작은 1년에 한편씩이라도 꼬박꼬박 쓰려는 극작가의 삶이 얼마나 깝깝한지는 활자를 넘어서도 전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졸업하고 한동안은 방황을 하다가, 시작했다.

뭘?

“뭔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단 졸업한 직후에 나는 태극권을 시작했다. 그냥 태극권도 아니고 가장 오래된, 가장 격렬하고 실전적이라는 하남성 온현 진가구의 진씨 가문 문중에서 시작되고 전했다는, ‘진씨 태극권’을 배우기 시작했다. 계기는 별다른 게 없었다. 나는 만성적인 허리, 무릎, 어깨의 3단 콤보 통증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100만원을 들여 MRI를 찍어도 원인이 불명이었다. 결국 재활을 위한 운동을 하나를 하긴 해야했는데, 당시 동네에는 요가 학원들이 남자는 받지를 않았고, 필라테스 학원들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운명처럼 태극권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때마침 ‘뭔가 전통적인 움직임’ 을 언젠가는 하나 배우기를 원했던 터라 시작하게 됐다.

그 후 1년 뒤에는 탱고를 시작했다. 마찬가지 계기는 별 거 없었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무용전공 동갑 친구에게 현대무용을 취미 겸 교양삼아 일주일에 2시간씩 배우다가 이 친구가 갑자기 바빠져서 클래스가 없어졌던 것이었다. 애초 수업료로 1원도 안내고 있었기에 내가 더 미안하면 미안했지 아쉬울 건 없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춤을 전문적으로 배워봐야지 생각하던 차였기에 뭔가 이대로 그만두기가 싫었다. 마침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탱고’ 동호회를 발견했고, 주저없이 바로 등록하고 시작했다.

그 비슷한 시기에는 막연하게나마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일단은 학사학위를 따기로 결정했다. 다니던 학교에서 전문학사를 딴 상태였기 때문에 1년짜리 추가 학사 과정을 들을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보를 종합해보고, 서울 디지털 대학교에 3학년 편입하고 중국학과에서 수업을 이수중이다. 인터넷강의로만 진행되는 대학생활이 조금은 생소하긴 했지만, 한국의 인터넷 속도와 인프라는 가히 최강인데다 온라인 대학이래도 수업이 허투루 진행될수 없기 때문에 꽤나 만족스런 수업 만족도를 느끼고 있다.

또 뭘 했더라, 아, 작년 겨울에 땄던 문화 예술 교육사 2급 자격증도 있었다.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국가 공인 문화 예술 교육사 자격증 중에서는 가장 높은 등급이었고, 이걸 땀으로 인해서 나는 공공 기관에서나 초중고등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진행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이건 사실 비상용으로 따놓은 거였기 때문에 실제로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걸 계기로 공공 도서관에서 3개월 정도, 그리고 사설 소모임에서 2개월 정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 적은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걸 빼놓을 뻔 했다. 이건 배움의 과정은 아니었지만, 칸투칸에서 프리터 생활을 시작한 것. 지금 몇 년짼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아마 내 백수생활의 시작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지난하고 때론 셀프로 절망에 빠져드는 생활 속에서도 한달에 한번 꼬박꼬박 통장에 박히는 세후 29만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칸투칸에 한번도 고마움을 표시한 적은 없지만 이 지면을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한다. 고마워요 칸투칸, 비록 쥐꼬리만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만한 돈을 글을 써서 벌어서 용돈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절망에 빠진 세월을 보내는 연극인이자 극작가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도움이 됐는지 당신들은 아마 미처 알지 못할거에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지난 3년간 굵직굵직한 것들만 해도 5개의 뭔가를 배우고, 또 이뤄내고 있었다. 사실 칸투칸은 배움은 아니지만, 이 활동을 하면서 뭔가를 이루기도 했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으니 리스트에 올려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3년간 본업에서 뭔가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힘들 때도 많았고, 그 어려움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뒤돌아보니, 나는 많은 걸 배웠고 또 많은 걸 성취해냈다.

태극권은 4년차가 됐고, 어깨, 허리, 무릎 통증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우슈 3단을 땄고, 이젠 더 건강해지는 걸 넘어 강해지는 목표를 세웠다. 탱고는 2년차가 됐고, 다음주에 동호회 활동이긴 하지만 KTC (Korea Tango Championship)에 참가한다. 파티에서 춤을 잘추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즐기기에는 큰 무리없을 정도로 춤을 추게 되었다. 학사학위는 올해가 끝나면 나온다. 중국학과 학사학위를 딴 졸업생이 되는 것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로써 유학이라는 목표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을 딴 덕분에 누군가를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덕분에 나의 연극관도 많은 정리가 되었다. 내가 교육자로 살 것인지, 예술가로 살 것인지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칸투칸, 글을 쓰는 활동으로 돈을 벌면서 이 모든 걸 이루는 데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다. 결국 끝까지 가는 놈이 이기는 거라고, 어쨌든 나는 연극인이자 극작가로 죽고싶은 게 소망이다. 뭐 재수없으면 300살까지 살수도 있는 시대라는데, 내 나이 30. 앞으로 270년 동안 아무리 못해도 연극 10편은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뭐 하다보면 태극권도 탱고도 연극처럼 100년넘게 할 수도 있겠지.

아무것도 안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뭐라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지금 이순간에도 뭐라도 하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잘 돼자. 뭐라도 하면서 버텼으니까. 앞으론 더 잘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