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좋게 깨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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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준비를 했지만 여전히 떨린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성과를 발표할 시간. 처음은 순조로웠다. 연습한 대로 잘 흘러간다. 기대보다 더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 나의 평가권을 가지고 있는 상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다. 이 정도면 완벽하다는 생각과 함께 긴장이 풀린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든 상사의 질문. 허를 찔렸다.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곳에서 질문이 나온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상사의 얼굴이 굳어진다. 시원찮은 대답을 한 나에게 온갖 추가 질문이 날아오고, 깊이 파인 상처엔 여지없이 소금이 뿌려진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나는 초라해진다. 그간에 쌓아 놓은 얼마 안 되는 ‘인정이라는 Credit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더 심각한 건,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하고 자존감은 땅바닥을 뚫고 지하로 꺼져버렸다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가차 없이 ‘깨지는 날’이다. 직장에선 칭찬이나 인정받는 일보다 그러하지 않은 날이 더 비일비재하다. 세상 모든 직장인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상사가 마음먹고 깨고자 한다면 피할 구멍이 없다. 그저 평소에 밉보이지 않는 것이 상책인지라, 하루하루 또한 조마조마하다.

그렇게 한바탕을 하고 나면 마음속에 울분이 생긴다. 상사라는 사람이 아랫사람 기를 살려주지는 못할망정 공개 석상에서 망신을 주나? 아니, 어떻게 사람이 모든 걸 알아? 지가 한 번 해보라지. 입장 바꾸어서 내가 받은 질문을 똑같이 하면 저도 대답할 수 있을까? 이와 더불어,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왜 굳이 그 타이밍에 그러한 질문을 했는지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 날은,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거나 애꿎은 주위 사람에게 짜증을 내곤 한다. 이래저래 마음은 무겁고, 자존심은 상하며 자존감은 곤두박질친다.

직장은 존중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다

세상살이가, 직장 생활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바로 ‘내성’이 아닐까 싶다. 깨지다 보면 ‘그러려니’하는 마음이 생긴다. 좀 더 생산적으로는,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준비가 부족했다거나, 상사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직장은 ‘존중’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윤추구’다. ‘이윤추구’를 위해선 ‘일’을 해야 하고, 이 ‘일’은 개인의 ‘존엄’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매출이나 실적이 좋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간혹 ‘인간 존중’, ‘사람이 먼저다’를 외치긴 하지만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을 때도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Professional의 무대인 것도, 또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에 목을 맨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점에서 ‘존중’이란 말은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인정’은 있을 수 있다. 일을 잘한다거나, 성과를 잘 낸다는 것. 회사에 도움이 된다거나, 조직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간다는 것 등.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정’은 ‘성과’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보상체계다. ‘존중’은 절대적인 상황에서도 유지되어야 하지만, ‘인정’은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람들

직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 천지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을 다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람은 많은 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세 보이려고 노력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세 보임으로써 다른 누군가 자신을 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내가 아는 어느 팀장은 항상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이니셜이 적힌 컵을 들고 다닌다. 회의 석상, 특히 타 팀과 함께 회의를 할 때면 눈에 띌 정도로 자신의 앞에 컵을 위치시킨다. 알아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의식을 강요한다. 그 후광을 뒤에 엎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나는 이러한 사람이니 함부로 반박하거나 어설픈 논리로 덤벼들지 말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그것을 건드리지 말라며 무언의 경고를 보낸다. 물론, 그것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반발이 더 크다. 실제로, 회의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해 한 마디씩 할 정도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미리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이 다칠까 노심초사다. ‘자존심’ 상하느니 그냥 먼저 다른 사람을 치겠다는 심리다. 별것 아닌 것에 매우 예민하고,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한 일이 발생하거나 지적을 당하면 길길이 날뛴다. 상대방의 실수를 발견했을 땐 이때가 기회다 싶어 공세를 가속화한다. 이 사람에겐 ‘자존심’ 상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험담하며, 함께 험담하는 사람을 자기편이라 느끼고 안도감을 갖는 것도 자신을 지키려는 심리다. ‘자존심’을 상하게 할 대상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너는 내편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전달한다. 그러한 라포르가 구축되면, 행여나 이 사람이 어떤 순간에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일은 없겠지 하며 안도한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자존심’을 다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하면 세상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구분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하지 않고 혼재하여 받아들여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존심’을 상하면 존재 자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그 두려움이 매우 커서, 누군가는 센 척을 하고 일부러 공격을 먼저 가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상하거나 무너진다고 해서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을 구분할 줄 알면 그렇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직장 생활은 ‘깨지는 날’의 연속이다. ‘인정’ 받고 기분이 상승할 때도 있지만, 그 등락은 롤러코스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크다. 그러니 ‘존중’에 대한 기대는 저버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절망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하며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직장은 ‘존중’ 받기 위한 곳이 아니라는 말에 실망했는가?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나는 오늘 직장에서 누군가를 ‘존중’한 적이 있는지를.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인정’했는지. 아니면 그보다는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나 단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