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외면해야 할 때

맛의 기억

한때 골목골목을 누비던 생활 반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문득, 문득 그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게는 대학생활 내내 지냈던 대학가 일대가 그런 곳이다. 학교 정문 바로 앞 고시원에서 지냈던 그 시절이 문득, 문득 생각난다. 볕 좋은 날이면 걸었던 UN평화공원이나 그 공원 호숫가에 동그랗게 말아 앉아 낮잠을 자던 오리들, 고시원 옥상에 빨래를 널고서 가만히 내려다 봤던 학교 캠퍼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쏘다녔던 골목골목들 같은 것들이.

그래도 제일 흔하고, 가까운 기억은 역시 삼시세끼의 맛이다. 대학가라 저렴하고 푸짐한 밥집이 많았다. 교내학식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10년 전 기억이긴 하지만 당시 돼지국밥이 3,000원이었던 곳도 있었다. 주로 돼지 두루치기 집이 많았는데, 내 또래의 부경대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한 번쯤 수미식당, 수복식당, 88두루치기 같은 곳에 삼삼오오 모여서 주린 배를 채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하지만 어떤 계기로 두 번 다시는 가지 않게 된 밥집이 하나 있다. 골목보다 더 좁은 골목을 3번 쯤 꺾어 들어가야 나오는 오래된 주택. 시멘트로 대충 칠해 수평도 맞지 않는 마당과 나무로 짠 마루가 있는 곳. 좌식 테이블에 앉으면 바로 옆 선반에 주인 할머니의 약국 봉투와 딱풀, 촌스러운 동전지갑이 어지럽게 담겨 있는 곳. 간판이 없어서 누구는 정우 분식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누구는 자매 분식이라고 부르는 곳. 그래도 다 알아서 찾아가던 곳.

특히 김치볶음밥과 된장찌개가 맛있었다. 두어 번 후배들, 친구들과 가보고서는 완전 반해버렸다.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어릴 적 김해 대성동의 할머니 집 같은 그 안락한 느낌이 좋아서. 나는 종종 점심시간의 허기를 꾹꾹 참았다가, 일부러 2시쯤 늦은 점심시간에 혼자 그곳으로 향했다. 그 시간엔 손님이 거의 없어서, 나는 정말 단 5분 만에 편하고 반가운 할머니 집에 밥 얻어먹으러 온 손자 녀석이 될 수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아침 드라마 재방송을 보면서 악역을 욕하고, 된장찌개를 먹으며 나도 맞장구를 치곤했다. 가끔 어디서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대학가에선 듣기 힘든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한동안 정우 분식인지 자매 분식인지 모를 그 밥집은 내 심신의 휴식처였다.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것을.

그러던 내가 다시는 그 밥집에 가지 않게 된 건, 작지만 확실한 무엇인가를 봤기 때문이었다. 안방을 기어 다니는 내 엄지만한 바퀴벌레였다. 하필 여자 친구와 함께 간 날이었다. 맛있다며 호들갑을 떨던 우리는,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왔다. 그 후로는 다시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 맛, 그 공간이 그립긴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온 것도 아니고, 그 오래되고 허름한 주택에 바퀴벌레 한 마리 없길 바랐던 거냐고. 그런 곳은 적당히 지저분한 걸 알면서도 감수하고 먹으러 가는 곳 아니냐고. 더 나아가면, 너희 집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고.

하지만 머릿속으로 예상하고 혼자 감수하는 것과, 현실을 두 눈으로 직면하는 것의 타격감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여전히 그곳의 된장찌개와 김치볶음밥이 그립고, 그 공간의 분위기와 화창한 여름날 마당에 흩뿌려지던 물의 반짝임, 주인 할머니의 약국 봉투와 그 수다까지 모든 것이 다 그립다. 그래도, 다시 그곳에서 뭔가 먹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때 그 바퀴벌레는 너무 컸고, 너무 선명했다. 순수한 허구보다 선명한 진실을 토대로 한 상상력이 더 강한 법이다.

애정을 외면해야 하는 씁쓸함

한때 애정을 쏟았던 것들을 외면해야만 하는 일은 안타깝고 씁쓸하다. 외면해야 하면서도 애정이 남아있을 때는 살짝 화가 나기도 한다. 왜 하필 바퀴벌레가 내 눈에 띈 거냐고, 아니 나는 왜 그 바퀴벌레를 봐버린 거냐고. 그걸 보지만 않았어도 나는 다시 거길 갈 수 있을 텐데.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야박하게 구는 꼴이 주인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나보다 비위가 좋은 사람들은 분명 거길 이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다행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엔 가수 문문이 2년 전, 강남의 공용 화장실 몰래 카메라 범죄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전에 썼던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문문의 노래들을 정말로, 정말로 좋아했다. 말하듯 부르는 것도 좋았고, 소박하고 아담하면서도 애틋한 멜로디, 시적인 가사들도 좋았다. 내 플레이리스트엔 문문의 노래만 6곡이 연달아 있었다. 그야말로 애정을 쏟았던 가수였다. 그런 가수가 알고 보니 몰래 카메라 범죄자였다니.

우선 그런 저급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이렇게 시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인간의 모순에 치가 떨렸다. 정우 분식인지 자매 분식인지 하는 밥집에서는 겨우 지나가는 바퀴벌레 한 마리였지만, 이건 그냥 내가 좋아했던 노래를 바퀴벌레가 부르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문문의 노래를 들을 수도 흥얼거릴 수도 없었다. 도저히, 도저히.

여전히 그 노래들은 내 취향인데, 여전히 나는 그 노래들을 좋아하는데, 그래도 외면해야 했다. 그 노래들을 계속 소비하면, 바퀴벌레의 배를 채워주는 게 되니까. 그런데 외면해야 하면서도 애정은 남아있어서 나는 화가 났다. 문문은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왜 그런 짓을 하고도 그렇게 좋은 노래를 짓고 불렀던 거냐고. 어쨌든 이제, 앞으로 다시 문문의 노래를 듣게 될 일은 없을 것이 확실해졌다. 아무리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도저히, 도저히.